본문 바로가기
  • 기록이 역사입니다-여수미술 아카이브
  •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문화예술
  • 행복한 삶을 위한 문화예술
■ Art story/옛그림보기

진달래 피는 봄이 오면

by May born JCY 2006. 10. 8.
조정육의 옛그림 읽기

[옛 그림 읽기] 신윤복의 <년소답청>



▲ 신윤복의 <년소답청>. 신윤복은 주로 양반과 남녀간의 춘정을 소재로 한 풍속화를 많이 남겼다. 그의 섬세한 붓끝에서 당시 양반들의 생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바야흐로 진달래 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하는 계절. 춘흥을 이기지 못한 한량과 기생들이 봄나들이에 나섰다. 이들이 지나가는 뒷 산과 앞 산에는, 기생의 볼 연지만큼이나 발그스레한 진달래꽃이 수줍은 듯 피어 있어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더욱 설레이게 한다. 한량들은 봄기운같이 얇은 배자를 입고 봄을 꺾으려고 나섰다. 소매가 좁고 춤이 짧은 저고리에 풍성한 치마를 입은 기생들은 한량들 사이에서 꽤나 알려진 명기(名妓)들인 것 같다. 그녀들의 요구라면 꼼짝 못하고 설설 기는 한량들의 모습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맨 앞쪽에 그려진 한량은, 견마잡이까지 동원하고 가장 탐스런 말을 끌고 왔다. 운전수가 딸린 벤츠를 끌고 온 만큼 세 여인 중에서도 가장 콧대 높은 미인을 차지할 수 있었다. 웬만해선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그녀다. 소풍갔다 돌아 오는 길인데도 굳이 장옷을 걸치고 있는 모습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자기 관리에 철저한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모르긴 해도 당시 한량들은 그녀의 얼굴 한 번 구경하기 위해 어지간히 많은 돈을 갔다 바쳐야만 했을 것이다.

‘너무도 예쁜 그녀’의 요구대로 진달래꽃을 꺾어 머리에 꽂아 준 두 번째 한량. 그는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천천히 오는 그녀의 보조에 맞추기 위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보고 있다. 그런 그의 표정에는, ‘어디 더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해 보아라. 내가 전부 다 들어줄테니...’ 하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담뱃대를 빨리 달라고 재촉하는 그녀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장죽을 바치는 세 번째 한량.
자기 집에서라면 어림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함께 살고 있는 안사람에게 장죽을 갔다 바치는 남정네는 없었을 테니까. 오히려 가장으로서 목에 힘 주기도 바빴을 것이다. 그렇게 근엄한 남자가 지금 그녀에게 장죽을 물려주고 있다. 행여 대통 안의 담배가 빠질세라 두 손으로 정성스레 갖다 바치고 있다.

그런데 일행의 맨 뒤에서는 추레한 행색을 하고 궁상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가 뒤따르고 있다. 모두들 짝이 있는데 그의 곁에는 꽃다운 기생도 없다. 이 남자의 찡그린 표정을 보면 ‘용기있는 사람만이 미인을 얻는다’는 격언이 무색해진다. 미인을 얻기 위해서는 용기보다는 ‘돈’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미인과 상춘놀이를 떠나려면 리무진은 아니더라도 ‘에쿠우스’나 ‘체어맨’ 정도는 끌고 나올 정도의 재력은 갖추어야 한다. 운전수가 딸린 벤츠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가 돈이 없어서 울상을 짓고 있는 걸까?

그림을 자세히 보면 맨 오른쪽에 있는 한량의 갓이 이상하다. 그는 지금 맨 뒤에 있는 말구종의 벙거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장난끼가 심했음을 알 수 있다. 모처럼 들뜬 기분으로 나온 야유회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일부러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한 것이다. 기왕 말구종이 되기로 작정한만큼 벙거지까지 쓰고 제대로 하겠다는 뜻이다. 그것은 마치 요즘 남자들이 노래방에 가서 흥을 돋우기 위해 넥타이를 풀러 머리띠로 묶는 행위와 비슷할 것이다. 또한 모처럼 휴가 나온 말년 병장이 군기가 빠져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있는 모습과도 비견될 것이다. 그러니까 맨 뒤의 맨상투 차림의 남자는 벙거지를 쓰고 있는 한량의 말구종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그의 손에는 말채찍이 들려 있지 않은가.

그렇게 놀이에 참여한 당사자들은 즐거운데 그 곁에서 수발해야 하는 ‘아랫것들’은 상전처럼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상전의 귀한 갓을 쓸 수도 없을 뿐더러 맨상투 차림으로 가자니 뭔가 허전하기까지 하다. 더구나 자신은 참여할 수 없는데 히히덕거리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말구종의 ‘슬픔’의 근원은 신분의 차이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화원(畵員)이었던 신한평(申漢枰:1726-?)의 아들인 신윤복(申潤福)은 춘화도(春畵圖)를 많이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속전이 전할 뿐 그에 관한 자료는 그다지 많지 않다. 영․정조 년간에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윤복은 주로 양반과 남녀간의 춘정을 소재로 한 풍속화를 많이 남겼다. 그의 섬세한 붓끝에서 당시 양반들의 생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의 그림이 아니었더라면 조선시대 양반들은 모두 도덕 군자에 성인으로만 기억되었을 것이다. 이 <년소답청>은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에 들어 있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혜원전신첩》에는 <단오풍정>을 비롯하여 <월하정인>과 <주유청강> 등 30점의 풍속화가 담겨 있다.

<년소답청>의 부분도. 세상에서 가장 기이하면서도 곱고,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요염
하고 가장 즐길 수 있는 것은 꽃. 그 중에서도 기생은 말하는 꽃이라 하여 '해어화(解語
話)라 일컬었다.

1844년 한산거사가 쓴 「한양가」에는, 당시 한량들이 기생들과 어울려 노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화려한 거문고는 안족(雁足)을 옮겨 놓고
문무현(文武絃) 다스리니 농현(弄絃) 소리 더욱 좋다.
한만한 저 다스림 길고 길고 구슬프다.
피리는 침을 뱉고 해금은 송진 그을고
장구는 굴레 죄어 더덕을 크게 치니
관현의 좋은 소리 심신이 황홀하다.
거상조 내린 후에 소리하는 어린 기생
한 손으로 머리 받고 아미를 반쯤 숙여
우조라 계면이며 소용(搔聳:가곡)이 편락(編樂:가곡)이며
춘면곡(春眠曲:가사) 처사가(處士歌:가사)며 어부사(漁夫詞) 상사별곡(相思別曲)
황계타령 매화타령 잡가 시조 듣기 좋다.

여기에 설매(雪梅), 홍장(紅粧), 자동선(紫洞仙), 옥매향(玉梅香), 황진이(黃眞伊), 선향(仙香),만향(晩香), 계월향(桂月香) 등의 기생들이 등장한다. 그 기생 중에는 관기를 비롯하여 내의녀, 침선녀까지 포함되어 있었고, 때론 공조(工曹)와 혜민서(惠民署)에서까지도 차출되어 나올 때도 있었다.

기생의 층위도 다양하여 늙은 기생, 젊은 기생, 이름 난 기생, 어린 기생 등으로 나눌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기이하면서도 곱고,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요염하고 가장 즐길 수 있는 것은 꽃. 그 중에서도 기생은 말하는 꽃이라 하여 ‘해어화’(解語話)라 일컬었다. 이 해어화가 나타나면 ‘아리따운 모습과 교태에 백가지 꽃이 빛을 잃었다.’ 이들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조차도 한량의 눈에는 예뻐 보였던지 흐느적거리는 기녀의 모습을 ‘바람에 흔들리는 꽃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만약 자신의 마누라였다면 ‘어디서 감히 여자가 추태를...!’ 하면서 진즉 손이 올라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량이 기생의 마음을 사로 잡으려면 다음의 다섯 가지 조건 속에 포함이 되어야 한다. 즉 기생이 잊기 어려운 다섯 가지가 있는데, ‘맨 처음 남편이 잊기 어렵고, 뛰어나게 미남자인 것이 잊기 어렵고, 정열적이고 씩씩한 것이 잊기 어렵고, 돈이 많아서 잘 쓰는 것과 추악해서 볼 수 없는 것이 잊기 어렵다’고 했다. 그 중에서 돈이 많은 남자를 만나는 것이 모든 기생들이 바라는 바였다. 돈만 많다면 설령 그 남자의 몰골이 추악해서 도저히 볼 수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참아낼 수 있다는 뜻이다.

속담에 ‘기생이 되어 남자에게 삿갓을 씌우지 못한다면 명기(名妓)가 아니다’고 하지 않았던가. 기생 때문에 가산을 탕진한 남자가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 삿갓을 쓰게 만들어야 진짜 기생이라는 뜻이다. 그러니만큼 기생에게는 돈 없고 잘생긴 남자보다 심하게 못생겼더라도 돈 많은 남자가 단연 ‘킹카’라는 뜻이다.

이능화(李能和:1869-1943)의 『조선해어화사』를 보면, ‘원래 기생이라는 것은 본디 지방 각 고을의 관비 중에서 선발하여 노래와 춤을 가르쳐서 여악(女樂)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시대가 발전됨에 따라 관청의 연회와 사회 교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라고 기생의 유래에 대해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량과 기생들이 주로 찾았던 야유회 장소는 어디였을까. 그 곳은 너무도 많아서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 서울 장안 40리 안팎의 놀이처를 보면 마치 공원의 벤치를 보는 것처럼 곳곳에 놓여져 있다. 사람들이 산책하다 다리가 팍팍해질 즈음이면 어김없이 발견되는 쉼터. 조양루, 석양루, 명선루, 춘수루, 홍엽정, 노인정, 송석원, 생화정, 영파정, 춘초정, 장유헌, 몽답정, 필운대, 상선대, 옥류동, 도화동, 망춘대, 세검정, 옥천암, 석경루, 한북문 진관, 경강정, 창랑정, 촉한정, 탁영정, 읍청루, 군자정...그만큼 한양이라는 도시가 명당처에 자리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조선 순조 때 김매순(金邁淳)이 찬한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를 보면

“서울의 꽃과 버들은 3월에 성하다. 남산의 잠두와 북악산의 필운대와 세심대는 유람객의 집합소였다. 따라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이고 안개같이 꾀어 한 달 동안 줄어들지를 않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상춘객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얼마 후면 황량했던 산에는 진달래꽃으로 불붙을 것이다. 그 옛날 계월향과 만향이 한량들의 수발을 받으며 지나갔던 자리에는 어떤 꽃이 피어 있을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