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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여행

개성관광

by May born JCY 2008. 1. 25.

처음 북한 땅을 밟은 설렘으로 들뜬 개성 관광


한 창 진

서둘러 신청한 개성 관광

지난 1월 5일 난생 처음 북한 땅을 밟아보는 개성 관광을 다녀왔다. 12월 5일 처음 관광을 시작하였다는 보도를 듣고서 3주 전에 여수의 여행사를 통해 신청을 하였다. 먼저 주소, 성명, 주민등록번호, 직업, 전화번호 등 인적 사항을 알려서 신청을 하고, 며칠 뒤에 18만원의 여행경비와 주민등록초본, 배경이 없는 여권용 사진 1장을 제출하였다.

하루 전날 저녁 11시 20분에 오림동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심야우등고속을 타고 갔다. 율촌산단 자동차 전용도로와 창평과 장성 간 고속도로 개통 등으로 서울까지 4시간 30분 정도로 시간이 단축되었다. 지하철 첫 운행이 5시 30분이어서 그 때까지 터미널에서 기다리다가 압구정역으로 가서 6시에 대원관광버스를 타고서 임진각으로 갔다.


출발지인 남측출입사무소에 가는 방법

임진각으로 가는 방법은 크게 개별적으로 자가용이나 대절 버스 등 개인 차량으로 가는 경우는 6시 30분까지 임진각역에 도착하면 무료 셔틀버스가 남측출입사무소까지 운행한다. 서울 인근 지역에서 출발하는 경우는 강북지역은 대화관광이 계동은 3호선 안국역 3번출구 150m 현대문화센타에서 05시 50분, 광화문은 5호선 광화문역 7번출구 70m 공항버스 정류장에서 6시, 6호선 마포구청역 7번출구 구청 앞에서 06시 10분이고, 강남지역은 2호선 종합운동장역 6번 출구에서 05시 30분, 3호선 압구정 현대백화점 주차장에서 06시에 왕복 5천원 셔틀버스가 출발한다. 셔틀버스는 최소 3일전에 대화관광(02-733-0017)과 대원관광(02-458-4550)에 예약해야 한다.


신경 써야 하는 출입 수속

외국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국가 체제를 갖고 있어서 휴대품이나 주의사항에 신경을 써야 한다. 사진이 붙은 신분증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휴대폰이나 충전기 등은 그곳 현대아산관광측에 맡겨야 한다. 사진기는 필름카메라는 안되고, 디지털카메라만 소지가 가능하다. 간식은 가지고 갈 수 있으나 신문은 절대 소지해서는 안된다. 북한에서 기념품 구입을 하려면 우리 화폐는 통용이 되지 않고, 미화만 가능하며 1달러 단위로 거래가 된다. 환전은 북측 출입사무소에서 수속이 끝나면 우리은행에서 직원이 나와 환전을 해준다.

7시경에 도라산 남측출입사무소 2층에서 현대아산관광측이 간단한 안내를 해주고, 개성관광명찰을 배부 받는다. 이 때 휴대폰과 충전기 등은 회사 측에 맡기면 나중 나올 때 버스까지 가져다준다. 그 밖의 물건은 500원 동전을 내고, 사물함에 보관하면 된다. 다음 1층으로 내려와, 세관용 통관신고서와 검역신고서를 간단히 작성을 한다. 1층에는 우리은행 365코너가 있어서 현금을 출금할 수 있어서 편리하였다.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구내매점이 있었다. 7시 30분 쯤 이면 출입증 확인과 같은 세관 통관 절차가 국제선 공항처럼 진행을 하지만 이곳에서는 출국이라 하지 않고, 경계선을 넘는다는 뜻에서 출경이라고 한다. 그렇게 까다롭지 않지만 검사대를 지나고, 소지품을 엑스레이검사대에 넣을 때는 비행기 탑승이나 외국 여행을 가는 것 같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넘었던 그 노란 군사분계선은 지워졌다.

출경 수속을 마친 우리는 조별 번호가 새겨져있는 대화관광과 대원관광버스를 탔다. 버스에는 현대아산 측에서 관광안내원이 탑승하였다. 버스 안에서 관광 안내 비디오를 시청하면서 남북 정상회담 때 생중계로 보여 주었던 그 남측 군사분계선까지 안내를 담당하는 국군 선도차를 따라 8시에 출발하였다.

도로변은 북쪽과 구별되는 것이 똑같은 가로등이 남쪽은 한반도 상징이 붙어 있고, 노랑띠를 두른다. 북쪽은 파랑띠만 둘러있다. 남측 군사초소를 넘어 비무장지대를 거쳐서 12대의 버스가 일렬로 지나가고 있다. 이윽고 그 노무현대통령이 넘었던 군사분계선, 사실상 지도상에만 나타나고 실제로는 아무런 표식을 찾을 수 없는 남북 분단의 상징, 휴전선을 지나는 순간이었다. 버스 앞 유리창으로만 보이는 것을 안내원 설명에 어떻게든 보려고 모두들 고개를 삐죽 내민다. 상징적 의미로 제2차 남북정상회담 때 노무현 대통령이 넘을 때 그 노란선은 그 때 칠한 것이어서 지금은 지워버리고 흔적이 검게 남아 있었다. 대통령 내외의 감격해 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보았던 그 때의 심정이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이 정도를 못 넘어서 60년이 넘게 기다려왔는지를 생각해보면 답답한 심정이었다.


북측 출입사무소의 긴장되지 않은 자유로운 분위기

군사분계선에서 가로등 상징이 바뀌고, 남측 군인 선도차는 되돌아가고, 북측 군인 선도차가 마중 나왔다. 차창 밖으로 경의선 열차 선로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고, 개성 공단을 향하는 40m 높이의 송전선 철탑이 씩씩하게 뻗어있었다. 야트막한 산등성이가 많이 보였고, 안개로 흐린 날씨지만 우리를 반기는 북한 땅이 보인다. 간간히 도로가에 서있는 북한군도 전혀 무섭게 보이지 않아서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앞으로 남측 도움으로 4차선 도로로 확장되고, 단선인 경의선도 복선으로 바뀔 것이라고 한다.

8시 12분에 우리는 북측 출입사무소에 도착하였다. 현대식 건물로 깔끔하게 지어졌으며 북한군인차가 주차되어 있고, 특유의 복장과 행진을 하는 북한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서 조별로 줄을 서서 남측 출입사무소에서 하였던 것처럼 똑같이 소지품 검사를 하였고, 출입증 확인을 남측에서는 바코드로 읽어서 시간이 적게 걸렸는데 이곳에서는 이미 얼굴 사진이 나와 있는 대장을 보고 우리 출입증과 일일이 대조해서 체크를 하였다. 10여 분 만에 절차를 마치고, 환전을 하였다.

처음 만나는 북측 사람들의 표정이 밝았고, 도착하자마 흘러나오는 “반갑습니다” 노래와 같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무시무시한 군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씨에서는 특유의 북한 말씨보다는 이웃 아저씨 같은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소형차를 개량해서 커피와 물을 팔고 있는 북측 판매원 아가씨는 웃음을 잃지 않고 친절하게 판매를 하고 있어서 신덕산물을 한 병 샀다.


북측 안내원의 안내를 받으면서 시작한 개성 관광

다시 우리 11호차를 탔을 때 북측 안내원 2명이 버스에 올랐다. 8시 34분에 북측 출입사무소를 출발하여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으로 갔던 그 개성 평양 간 고속도로를 타고 갔다. 안내원은 명승지 개발단에 소속된 사람이라고 자기 소개를 하고, 즐겁고 인상에 남는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로 안내를 시작하였다. 특이한 것은 관광지를 참관지라고 하였고, 북측을 소개하면서 ‘우리나라’라고 해서 약간 착각에 젖어들 수도 있었다. 관광지는 마음대로 사진을 찍을 수 있어도, 민간인들과 거리 풍경을 찍을 수 없다고 하였다. 특히 차안에서 마음대로 거리를 찍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가는 도중에 김일성 주석 사진과 “영광스러운 조선노동당 만세!”와 같은 구호들이 붙어있는 건물을 보았다. 맨 먼저 우리를 반기는 것은 개성공단이었다. 64개 회사가 진출해 있고, 널찍한 공단 부지에 드문드문 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아직도 부지가 많이 남아있었고, 우리 남쪽 어느 산단을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로 우리 식 공단을 조성하고 있었다. 패밀리마트도 눈에 띄어 모두들 반가워하였다. 봉동역전을 지나면서 안내원은 지난 12월 11일 문산 봉동 간 화물차가 개통되었고, 끊어진 북과 남의 철도를 연결한 이 서해선으로 올해 베이징 올림픽 때 남북 공동 응원단이 응원하러 가는 것을 힘주어 말하였다. 12월 5일 첫 개성 관광 시작을 알리는 행사를 했던 곳을 ‘만남의 다리’라고 하였다.


처음 마주친 개성 거리 모습

안내원은 개성은 ‘성이 열려져 있다’는 뜻으로 16개의 성이 분지를 둘러싸고 있으며 그 중 라성은 길이가 60리가 된다고 하였다. 개성의 대표산인 송악산은 건강한 여성이 머리채를 풀고 누워있는 모습으로 어머니 산이고, 김일성 주석 동상이 있는 야트막한 자남산은 아들 산이라고 하였다.

곳곳이 그리 높지 않은 언덕으로 되어 있고, 나무 한 그루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좁다란 계단식 밭들이 켜켜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 차도 다니지 않는 길거리에서 교통 안내를 하는 군인들이 보였다. 지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면 쉬이 손을 흔들어 답을 해 주었다.

<얼음이 얼려있는 박연폭포>

시내에 진입하면서 더욱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 부모와 손을 잡고 걸어가는 어린 소년, 한가롭게 걸어가는 아주머니 등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모두가 밝은 표정이었고, 우리를 바라보는 눈이 전혀 경계하는 눈치는 아닌 것 같았다.

중심 거리를 통일거리라고 하였고, 분단의 슬픔을 간직한 통일 다리도 있었다. 통일거리에는 영화관도 있었다. 조금 낡았지만 시내에는 15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와 같은 주거 시설이 여러 개 보였다. 안내원에게 물어보면 승강기가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일제 때 없어져 버린 고려시대부터 유명한 문인 오정문은 예성강 벽란도로 가는 길이다. 그밖에 왕건 왕릉이 있는 만수산, 38선이 지나간 자리로 이제는 38선이 풀렸다고 해서 해선동이 있었다.


박연폭포 가는 길

박연폭포는 개성 평양 간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개성에서 27km 떨어져 있다. 말이 고속도로이지 중앙 분리대는 키 작은 측백나무를 드문드문 심었고, 포장 상태는 10년이 넘게 최소 덧씌우기 조차 하지 않아 우둘투둘하였다.

박연폭포를 가면서 자연스럽게 시골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집들이 천편일률적으로 흰색 벽에 검정기와집으로 단정하게 줄지어 있으며 집 외에는 어떤 창고나 외양간 같은 부속 시설을 볼 수 없었다. ‘박연리 4반’이라는 마을 안내 표지는 같은 행정구역임을 알 수 있었다. 산은 겨울이어서 더 황량하게 느낄 수 있지만 숲은 없고, 길가 편에만 오래 전에 조림하였는지 잣나무들이 듬성듬성 심어져 있었다. 논보다는 밭이 많았는데 그 밭 이랑에는 언제 수확하였는지 말라버린 곡식 줄기들이 스산한 겨울을 채워 주고 있었다. 농촌 마을에서는 사람들을 보기가 힘들었고, 간혹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겹게 느껴졌다.

가는 도중에 서먹한 분위기를 깨뜨리려고 선뜻 “아내의 노래”를 부르겠다고 하면서 무반주로 진짜 아내를 생각하는 것처럼 진지하게 노래를 불렀다. 북한에서는 여성을 꽃이라고 하여 우대를 한다고 하였다.


역시 박연폭포는 송도삼절

<박연폭포에서 유홍준 문화재청장과 기념사진>

버스에서 내려 주차장에서 800m 정도 올라가면 그 유명한 송도3절의 하나인 박연폭포를 만날 수 있다. 박연폭포는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를 흐르는 계곡물이 바가지 모양의 박연에 모여서 떨어지는 37m 높이의 폭포이다. 겨울이어서 떨어지는 폭포수가 옥색빛이 나오는 수정 애메랄드와 같은 얼음 조각품이 만들어졌다. 천연의 예술품인 얼음 조형물 안쪽으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탄성을 지르면서 모두들 폭포를 배경으로 좋은 자리에서 사진 찍기에 바빴다. 이때 눈에 익은 인물을 발견하였다. 바로 문화유산답사기를 쓰시고, 현재 문화재청장으로 계시는 유홍준 교수와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 몇 마디를 나누었다.

<대흥산성 북문 안내판>

이 폭포에는 황진이가 머리채로 쓴 글을 다시 새겼다는 용바위와 폭포와 연못을 내려다보는 범사정이 있었다.

주차장쪽에서도 보았지만 빨간색 옷차림의 판매원이 있는 매점이 이곳에도 있었다. 커피 한 잔이 1달러, 인삼차, 호두알, 잣, 과자, 빵 등을 팔고 있었다. 10달러에 호두알 1봉지를 사고 관음사를 향해 폭포 옆길로 산을 올랐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서 폭포 위쯤에서 고려 때 쌓은 대흥산성과 성의 북문을 보았다. 10km가 넘는 길이와 튼튼하게 축조한 성은 요새와 같았다.

<온통 바위에 새긴 이름들>

북문을 지나면 또, 매점이 있어서 관광객들은 판매원과 함께 사진을 찍는다. 보이는 바위마다 정자체로 이름을 새겨놓은 것이 많이 보인다. 북측에서 새긴 선전 문구는 성거산 벼랑에 보이고, 조선시대 때 새겼다는 이름 글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곳은 숲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깎아지른 절벽위에 파란 소나무가 독야청청한 모습으로 활기를 더해 주고 있다. 여름철에나 가을철에 보면 색다른 경치를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폭포로 내려가는 계곡 사이 흐르는 물은 빼어난 바위들을 만들어 낸 것처럼 금새 콸콸콸 흐를 것 같다.

시골 기와집 같은 'ㄱ'자형 집이 나타나 애써 올라온 관음사 대웅전인줄 알고 실망하려고 하였으나

<관음사 대웅전>

진짜

<관음사 관음굴의 관세음보살상>

대웅전은 바로 뒤에 있었다. 570년에 동굴을 발견하여서 그곳에 유백색 대리석으로 만든 1.2m 관세음보살상 1쌍을 세웠다고 한다. 지금은 관음굴에 1개가 있고, 또 다른 1개는 평양조선불교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 이후 970년에 관음사가 세워졌는데 1393년 대웅전 5개동을 보수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46년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관음사는 북한과 남한 모두 보물로 지정할 정도이고, 북한에서 절집이 그대로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절이다. 관음사 절에 있는 약수는 1잔을 마시면 10년이 젊어지고,

<관음사 대웅전 미완성 문>

2잔을 마시면 소년이 되며 3잔을 마시면 아기가 된다는 이야기에 따라 관광객이 졸졸 흐르는 물을 먹기 위해서 줄을 서서 기다린다. 관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미완성문이다. 운나라는 소년이 5살 때 조각기술을 배워서

<관음사 약수를 마시기 위해 줄 서있는 모습>

11살 때 소년 조각가가 되어 1646년 관음사 중건에 참여하여 대웅전을 문살을 조각하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편찮으시다는 소식에 고향을 다녀오겠다고 하였지만, 봉건 지주가 거부하여 계속 일을 하던 중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렇게 부모에게 불효를 하게 된 것은 모두 손재주 때문이라는 생각에서 도끼로 오른팔을 잘랐고, 그 길로 나가서 농민 봉기단을 이끌었다고 한다. 이후 미완성된 문을 그대로 놔두고, 또 다른 문에 똑같이 이와 같은 사실을 새겨서 보관하고 있었다.


11첩 개성 한정식으로 맛본 점심

박연폭포 관광을 마치고 다시 우리는 개성 시내로 들어왔다. 아침보다 훨씬 많은 시민들이 걸어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우리가 흔드는 손에 맞춰서 손을 흔들어서 환영을 하였다. 새벽같이 개성관광에 참여해서 배가 출출하였다. 관광객을 2팀으로 나눠서 시내 한 복판 통일거리에 있는 통일관과 민속여관에 가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통일관에서 봉사를 하는 북한 처녀>

<놋쇠로 된 개인 한정식>

우리는 통일관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입구에 아까 박연폭포에서 보았던 그 고사리와 각종 술, 기념품 등을 팔고 있었다. 한복을 입은 기껏해야 18살 정도의 앳된 처녀들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원탁 식탁에 개별적으로 놋쇠 반상기가 놓여 있었다. 6-8명씩 앉아 있는 곳에 생수 1병을 가운데에 두었다. 놋쇠 그릇 뚜껑을 가져가고, 1인당 1잔의 북한 소주를 따라 주었다. 다른 음식은 미리 준비한 것이라 차가웠지만 마지막에 가져온 국은 뜨뜻했다. 닭곰탕과 같았으며 건더기보다는 맑은 국 중심이었지만 속을 데워 주었다. 밥은 어릴 적 먹었던 놋쇠 그릇에 가득 담아서 양이 많았고, 다른 반찬으로는 김, 생선 구운것, 도라지 무침, 달걀 반숙 조각, 돼지고기, 김치, 오이 절임, 무부침전, 도토리묵 등이 나왔다. 전체적으로 향료나 조미료를 넣지 않아서 순하고 담백하였다. 워낙 양이 많아서 다 먹고 나니 포만감 때문에 졸음 쫓느라 바빴다.

통일관 대형 홀에는 노래방 PDP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자유스럽게 담소를 하면서 음식을 먹었다. 끝까지 서서 손님들의 표정을 읽고 있는 멋진 아가씨들의 센스 있는 행동에 감동하였다. 식사를 물리치고, 안내원이 이 곳 통일관은 자남산에 있고, 산 정상에는 김일성 주석 동상이 있으므로 예의를 갖춰 촬영을 하라고 하였다. 근처가 개성의 중심지이고, 가까이에 남문이 있어서 얼른 도로가까지 내려갔으나 접근을 통제하였다. 가까이 갈 수 없고, 정해진 장소에서 관람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눈에 드러나지 않게 시내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지혜롭게 대처를

<점심을 먹었던 통일관>

잘 한다. 가까이에 개성백화점과 개성학생도서관 등 공공시설들이 보이는 중심지 이다. 짓다가 만 아파트, 상점 간판은 보이는데 화려해 보이지 않다. 널따란 8차선 정도의 큰 길에 다니는 차는 거의 없는데도 시민들은 건널목으로만 통행하는 등 기초 질서를 잘 지키고 있다. 통일관 뒤쪽으로는 전통 민속 가옥이 남산 한옥촌 처럼 그대로 남아있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어서 난방을 안내원에게 물었더니 연탄이라고 한다. 6·25 한국전쟁으로 많은 시설이 파괴되었지만 옛 건물을 그대로 보존한다고 한다. 조그만 개울에 흐르는 물이 깨끗하지 않은 것이 하수도와 같이 쓰이고 있는 것 같았다. 저쪽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이야기도 나누고 싶고, 집안도 구경했으면 하였는데 그것까지는 허용이 되지 않아 안타까웠다. 이 정도라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 발전된 것이고, 남북 화해와 교류가 더욱 활발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숭양서원 사당에서 내려오는 관광객>

<숭양서원 정몽주 영정>

정몽주 집터에 세운 숭양서원

점심을 먹고 13시 28분에 통일관을 떠나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숭양서원으로 갔다. 개성시 문화회관 뒤에 있는 숭양서원은 옛날 고려 충신 정몽주의 집터로 1573년 개성유수 남응운이 유림들과 협의하여 정몽주의 충절과 서경덕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문충당을 세웠다.

그 후 숭양이라는 사액이 내려서 지금의 숭양서원이 되었다. 정몽주의 영정이 세워져 있고, 그밖에도 김육, 조익, 우현보 등을 추가로 위패를 모시고 있었다. 말을 타고 내리는 하마대에 새겨져 있는 동물 조각은 그 자체가 훌륭한 미술품이었다. 사당에 올라 앞쪽 산을 보았을 때 상당히 많은 주민들이 모여있는 모습이 보여서 살짝 사진을 찍고 싶은 충동에 찍었으나 걸리면 벌금이 50만원이라는 옆 사람들의 말에

<숭양서원 하마대>

차안에서

<숭양서원 하마대>

얼른 지워버렸다.


선홍색의 핏물 흔적이 보이는 선죽교

바로 옆인데도 다시 차를 타고 선죽교와 표충비를 보러갔다. 차를 돌리는 곳이 그 유명한 각종 남북회담이 열리는 자남성여관이었고, 개성경공업대학건물이 보였다. 말로만 들었던 그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목숨을 잃은 선죽교를 방문하였다.

선죽교는 919년에 축조된 돌다리로 길이 6.67m에 너비 2.54m의 조그만 규모이다. 처음에는 선지교로 불렀다가 1392년 4월 4일 정몽주가 희생된 이후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고, 주위에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가 돋아났다고 해서 선죽교라고 불렀다. 그 다리에는 후손들이 난간을 만들어 통행할 수 없게 하였고, 바로 옆에 또 다른 돌다리를 놓았다. 한석봉이 선죽교라는 글씨를 직접 써서 만든 비석이 있었다.

<선죽교에서 해설자의 설명을 듣고 있는 관광객>

<한석봉 글씨의 선죽교 비석>

선죽교 바로 앞 길 건너에는 표충각이 있고, 강직한 충신의 원혼을 달래고 널리 칭송하기 위해서 거북이 암수컷 1쌍 기단에 표충비를 세웠다. 거북이 코를 만지면 복을 준다고 해서 사람들이 많이 만져서 번들번들하였다.


<고려박물관 안내도>

문화재 훼손이 우려되는 고려박물관



<남측관광객으로 붐비는 고려박물관>

선죽교 바로 옆 가까이인데도 다시 버스를 타고 마지막 관광지인 고려박물관을 찾았다. 고려박물관은 고려시대에는 지금의 대학교인 성균관이었다. 북측 최대 목조건물로 1988년에 개관하였다고 한다. 고려의 역사, 경제, 과학, 문화의 발전 모습을 알 수 있는 1,000 여 점의 유물을 4개의 전시관에 전시를 하였다. 개관 당시 김일성 주석이 방문한 사진을 크게 만들어 붙여 두었다.

정문에 들어서면 왼쪽으로는 새롭게 관광객을 맞이할 기념품점이 있었고, 반대편에는 우표 화폐 전시관이 있었다. 고려시대 성균관 건물이어서 그런지 1,000년이 넘은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팽나무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어 세월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전시된 왕건 왕릉 모형>

<왕건 왕릉 내부의 모습>

기념품점에서는 판매원들이 나와서 반갑게 맞이할 뿐 박물관 견학을 마칠 때까지 판매를 하지 않았다. 쇼핑을 하기 전에 박물관과 전시관을 먼저 둘러보라는 의도적인 배려이다. 박물관이라고 하기보다는 전시관이라고 할 수 있는 규모이고 전시 시설이 열악해서 안타깝다. 낭랑한 목소리의 해설사가 먼저 안내한 곳은 왕건 왕릉 모형이다. 일제강점기에 도굴을 시도했지만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출입구를 못 찾아서 실패했다는 설명이다. 실제 단단한 축조 모습을 알 수 있도록 왕릉 내부의 모습을 꾸며놓았다. 고려청자이기 때문에 청자 유물을 많이 전시해 두었고, 북한의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전시판으로 대신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고려시대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쇄를 한 책자인 ‘직지’ 전시였다. 돋보기로 최초 금속활자를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박물관을 관람하는 관광객>

<전시되어 있는 직지 책자>

<전시되어 있는 고려청자>

전시관 바깥뜰에는 불일사 5층석탑과 흥국사탑, 현화사 7층석탑, 현화사비, 개국사 석등 등의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 입구에 파묻혀 있는 용 조각>

자유 시장 가능성이 엿보인 기념품 판매점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에서는 물품을 사고파는 시장의 기능이 중요하다. 품질의 우수성과 그에 걸맞는 가격 경쟁 체제는 기술 개발을 부채질한다. 공식적으로 상품 구입을 할 수

<고려박물관 기념품점 내부>

있다는 안내를 한 곳이 바로 고려박물관 기념품점이다. 개성 관광을 겨냥해서 조립식 건물을 만든 것 같았다. 상점은 여러 곳이지만 대부분 똑같은 제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인삼과 장뇌삼 등을 넣어 만든 술과 인삼차, 고사리 말린 것, 잣, 호두, 더덕 말린 것, 놋쇠 수저, 인형 등이 있었다. 가격은 관광지 매점이나 똑같았고, 제품도 거의 같은 것이었다. 개성에서 직접 만든 토산품보다는 평양에서 나온 제품이 많았다. 판매원들이 맡은 분야에서 판매를 하고, 판매한 기록은 종이에 표시를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혹시 ‘계산이 틀리면 어떨까?’하는 조바심까지 생길 정도로 판매 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것 같았다. 한꺼번에 손님이 몰렸는데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면서도 상냥하게 손님을 맞는 판매원 아가씨들의 친절한 태도는 인상적이었다.

비록 제품은 다양하지 않고, 디자인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북한 사회 변화를 읽는 것 같아서 왠지 기분이 좋았다. 북한 경제에 도움이 된다면 환전해간 달러를 다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것저것 사는 마음은 관광객 모두 똑같은 심정일 것 같았다. 장뇌삼 들쭉술 2병을 들고 내내 돌아다녔지만 무겁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개성공업지구를 돌아서 끝난 개성 관광

설렘으로 가득찬 개성 관광은 이제 개성공업지구를 지나는 것으로 끝난다. 가는 길목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고, 안쪽으로는 회의를 하고 있는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퇴근 시간인지 거리에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있으며 소년단 아이들이 그 빨간 스카프를 메고, 밴드부의 연주에 발맞추어 행진하는 것은 60년대 우리가 어렸을 때 모습이 연상되었다. 개성공단에 출퇴근하는 버스들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이 곧 교대 근무를 하려고 대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졌다.

예상은 어느 공장의 내부 모습을 볼 수 있지는 않을까 했는데 아쉽게 개성공업지구를 돌아서 북측 출입사무소로 가는 것이었다. 개성공업지구는 개성시내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2002년 12월에 착공하였고, 총면적이 2,000만평이다. 그 중 개성 공단이 850만 평, 배후 도시가 1,150만평으로 구성될 예정이라고 한다. 공단 조성 완료 시점이 2010년이고, 그 때 입주 기업의 수는 2,000 개, 인구는 45만 명, 고용 인구 25만 명, 연 생산액 150억 달러이다.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으로 본다.

개성공업단지를 돌아서 북측 출입사무소에 도착한 시각은 16시 20분이다. 북측 관광안내원은 차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우리도 관광버스에서 내려 들어올 때 마찬가지로 휴대품 검열과 출입증 확인과 제출을 하였다. 특히 보안요원이 디카 사진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의심나는 부분은 되물어보고 삭제를 하였다. 다시 버스에 탑승해서 북한군 차의 인도에 따라 군사분계선을 통과한 시각은 17시이다. 그 사이 대기하면서 현대 안내인이 설명한대로 왼쪽으로 북한의 선전마을 기정동마을과 중간 거리에 판문점이 보였고, 그 만큼의 거리에 대성동 평화마을이 보였다. 서로 인공기와 태극기 게양대 높이 경쟁 때문에 높다랗게 솟아올랐지만 지금은 우리 쪽이 먼저 멈췄다고 한다. 남북 분단의 서글픈 이야기를 들으면서 개성관광에서 느꼈던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를 태운 남측 관광버스>

가장 가까이에서 본 북한 주민 생활

이번 개성 관광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던 재미있는 서커스나 무용은 없었다. 금강산 같은 대단한 경치도 없었다. 그러나 매력적인 것을 들라하면 아무래도 지난 60년이 넘게 가볼 수 없었던 북한 사회를 가장 가까이 가서 살짝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거리의 건물과 주민들이 사는 집이나 각종 도로 등 시설은 낡고 험하였지만 안내원이나 거리에 돌아다니는 시민들의 표정은 너무나 밝고 환하였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면서 반갑게 맞이해 주는 것은 같은 민족이라는 연대감과 끈끈한 정이 아닐까 한다. 안내원들의 거리감 없는 대화와 남한에 대한 풍부한 이해, 통일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시내와 농촌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일거리가 없을 것 같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겨울철에도 농촌에서 작물을 심거나 경제적 활동을 할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시내에서 간혹 보이는 공장이 주로 식료품 공장, 고추장이나 된장 공장 등이었다. 들판과 산의 흙도 선입견에서 보아서 그런지 거름기가 없는 것 같이 느껴졌다. 우리가 화학비료이지만 비료를 많이 보내서 농사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 보기에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보이지만 이것도 개성공단이 완성되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받은 임금이 개성 시민들의 살림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보면 앞으로 활성화가 크게 기대된다.


당당히 공개한 자신감의 효과

아쉬움을 남기고 그 군사분계선을 건너 북한 군인차를 보내고 우리 국군차의 안내를 받으며 남측 출입사무소로 되돌아왔다. 차 안에까지 소지품을 가지고 와서 배부를 한 다음 우리는 다시 처음 작성한 통관신고서와 검역신고서를 제출하고, 휴대품 통관 절차를 밟은 다음 조금 세밀한 휴대품과 식품 검열을 받았다.

출입사무소에서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임진각역으로 돌아와 서울행 통근기차를 탔다. 이렇게 생각하지 못한 개성 관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1004 남북정상회담 결과이고, 북한 측이 당당하게 개성을 공개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주민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그들이 살고 있는 모습이나 거리를 찍을 수 없다는 아쉬운 점이 있지만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여행이었다. 앞으로 개성에서 숙박을 하고, 영통사, 왕건 왕릉, 공민왕릉, 예성강 벽란도 등 더 많은 관광지를 둘러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평양과 백두산까지도 관광길이 열려서 외국 여행 가는 발길이 돌려졌으면 한다. 관광객이 많을수록 그만큼 북측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무엇보다도 북한에 대한 바른 이해와 남북 평화를 위해서는 민간인들의 자유로운 교류가 중요하다.

앞으로 여수에서도 많은 시민들이 개인적으로나 단체로 개성 관광을 많이 다녀왔으면 한다. 또, 우리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는 멸치와 갓김치 등을 보내고, 그곳 바닷가 마을과 해양수산남북교류를 추진하였으면 한다. <끝>

첨부파일 :

처음 북한 땅을 밟은 설렘으로 가득 찬 개성 관광.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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