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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 story/미술 이야기

모나리자 이야기

by May born JCY 2005. 10. 14.

“모나리자의 미소”는 보는 사람에게 신비성을 느끼게 하여 많은 풍설(風說)과 함께 “모나리자의 수수께끼”로서 오늘날도 적지 않은 문학적 관심거리이다. 요컨대 이 그림은 레오다르도 다 빈치의 인간에 대한 오묘한 감정과 관능의 표현인 것이다. 이 그림의 역사적 경로에는 불분명한 점이 많아 모나리자에 대한 신비성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MONNA LISA
1503~06년 제작. 나무판 위에 유채 77*53cm. 파리 루브르 미술관 소장.
모나리자의 안색이 창백한 것에 대해 “어린 딸을 잃은 슬픔 때문이었다”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1951년 1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탄생 500주년을 기념해서 마련된 전시회를 앞두고 실험실에서 밝혀낸 결과, 얼굴의 색조가 변질된 것으로 밝혀졌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흰빛을 띈 상아빛 색조를 뚜렷하게 드러내기 위해 래커와 꼭두서니 뿌리에서 빼낸 붉은 염료로 모나리자의 은은한 얼굴빛을 그려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이것이 사라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이 초상화를 완성하기 위해 수많은 주문을 거절하기도 했는데. 그가 이 초상화에 왜 그토록 집착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밀라노, 로마, 프랑스로 옮겨다닐 때에도 '모나리자'는 언제나 그와 함께 했다.

[모나리자]의 최초 소유자는 누구였을까?
1519년 5월2일 레오나르도의 제자이자 유언 집행자였던 프란시스코 멜지는 그날 그의 곁에 없었고, 위대한 천재를 너무나 아꼈던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가 밤새워 그의 임종을 지켰다.


Portrait of Francois I, King of France 1525-30

프랑수아 1세는 1534년 퐁텐블로 성의 야심만만하고 독창적인 형태로 건축한 욕실 벽에 [모나리자]를 걸어놓았다. 그림을 욕실에 걸어 놓을 수가 있느냐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그 당시의 욕실은 모임의 장소이자 중요한 안건이 결정 나는 중요한 장소였다. 욕탕에는 에로틱한 신화의 주인공들을 묘사한 프레스코 벽화로 꾸며져 있었고 휴게실에는 안드레아 델 사르토, 라파엘, 티티엔의 대표작과 더불어 [모나리자]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Palace of Fontainebleau
[모나리자]가 퐁텐플로의 욕실에 걸리자 버킹엄 대공(조지 빌리어즈 : 앙리 4세의 딸, 앙리에트 마리를 왕비로 맞아들이려던 찰스 1세의 특사로 파견됨)이 그림에 눈독을 들였다. 공작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예술품 애호가로 프랑스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을 손에 넣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지만, 루이 13세 측의 중매쟁이가 적극적으로 반대함으로써 [모나리자]는 프랑스 공주의 약혼 선물로서 영불해협을 건너지 않게 되었다. 다행히 공주는 [모나리자] 없이 무사히 결혼했다.

[모나리자]는 1695년 태양왕의 작은 갤러리에 걸리게 되었다.
1706년 베르사유에 있던 태양왕 갤러리로 다시 되돌아가서 1764년까지 제1전시실을 장식했다. 프랑스적 취향을 즐겼던 루이15세는 [모나리자] 취향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모나리자]는 1760년 재무장관의 응접실로 옮겨졌는데, 퐁텐플로의 욕실이나 베르사유의 갤러리에 비하면 모나리자의 수난시대였다. 여하튼 모나리자는 1788년까지 계속 그곳에 있었지만, 대혁명으로 인하여 '모나리자는 국가 재산이다'라는 선언 하에 또 다른 사건들이 일어난다.
예술 중앙 박물관은 군주제가 몰락한 첫 해를 기념한다는 뜻에서 상징적으로 1793년 8월10일에 개관되었으며, 일반 시민에게는 1월18일부터 관람이 허용되었다.
왕들이 수집한 위대한 예술품들을 복원, 전시하기 위해 전문가들은 여러 작품을 둘러보았다.
100여 점의 작품 중에서도 푸셍의 그림 3점, 티티엔의 작품 3점,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아름다운 페르니에르], [성스러운 가족], [모나리자]가 가장 눈에 띄었다고 한다.



Virgin & Child with St. Anne & John the Baptist (The Cartoon with St. Anne)

이렇게 모나리자는 프랑수아 1세와 그 신하들이 목욕하던 모습을 지켜보다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었고, 튈르리 궁전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1800년! 나폴레옹은 튈르리 궁전의 주인이 되었고, "튈르리 궁전의 옛 흔적을 모두 지워라!"라는 명령을 내린다.



The Palais des Tuileries

1804년 나폴레옹은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서 약탈해 온 전리품과 더불어 모나리자를 셍-클루 성으로 보냈다. 나폴레옹은 모나리자에 애착을 가지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 후 거의 100년 동안 그 자리를 모나리자는 지키고 있었다.


일부학자들과 애호가만이 감상할 수 있었던 [모나리자]는 19세기 중반부터 판화, 1880년대부터는 사진으로 대중들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진다. 또, 잡지의 표지 모델로 우표 속의 여인으로, 루브르의 상징이자 파리의 자랑거리로 대중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1911년 8월 21일, '모나리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루브르 박물관측은 그 초상화를 찾아주는 사람에게 2만5천 프랑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하고, 그 밖의 후원회에서도 5만 프랑을 주겠다, 신문사로 가져오면 4만 프랑을 주겠다 등등 보상금을 내걸었다.
당시 27살로 건물 벽에 그림을 그리던 이탈리아 화가(빈센조 페루기아)는 아주 대담한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 루브르의 정기 휴일이던 1911년 8월21일 월요일 아침 일찍 그는 살롱 카레에서 [모나리자]를 떼어내서 여유 있게 걸어나갔다. 경비원들은 사진을 찍으려는 것이라 생각하고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설마 루브르로 들어와 당당히 도둑질을 해 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페루기아가 그림을 갖고 유유히 떠나고 난 후1시간 후에야 그림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Giuseppe Castiglione The "Salon Carre", in 1865, at the Louvre Museum

빈센조 페루기아는 어떻게 그림을 훔쳤던 것일까? 훗날 그가 자백한 범행 일체는 이러했다. 세느강 쪽으로 있는 쟝-구종 문을 통해 박물관으로 들어간 후 주형실을 지나 중앙 계단을 통해서 살롱 카레로 들어갔다. 액자를 좁은 계단에서 벗겨내고 그림만 셔츠로 둘둘 말아 감추고 다시 중앙 계단으로 올라가 르퓌엘 문을 통해 루브르 강둑으로 빠져나갔다. 페루기아는 1910년에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 박물관의 구조를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지문을 채취해서 모나리자의 유리에서 발견된 엄지손가락의 지문과 비교해 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의 초라한 방을 뒤져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허름한 나무 상자 속에 무려 2년 반 동안이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모나리자'를 감춰둘 수 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범인이 피렌체의 미술상 A.골리에게 팔러 나갔을 때, 골리의 기지로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다.
피렌체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그는 '모나리자'를 조국의 품에 돌려주고 싶었다고 주장하였다. 이탈리아 이민자에 대한 프랑스인의 차별에 분노를 터뜨린 이런 애국적 행동은 피렌체 시민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결국 그는 1년2주일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경비원들을 비롯해 루브르의 고위 관계자들은 전부 해고를 당하였다.

20세기에도 모나리자의 수난은 계속 되었다. 1919년 마르셀 뒤샹에게 호된 시련을 당해야 했다.
뒤샹은 피렌체의 여인에게 콧수염과 짤막한 턱수염을 그려 넣고 L.H.O.O.Q. 라는 수수께기 같은 글을 남겨 놓았다.



Marcel Duchamp, L.H.O.O.Q., 1919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모나리자를 이용한 그림들이 나돌았다.






그러나 모나리자를 향한 경외심은 여전했고, 2차 대전 중 파리를 점령했던 독일군 조차도 그녀를 여신처럼 떠받들었다. 독일군의 진주에 따라 모나리자는 루브르 박물관의 예술품들과 함께 긴 여행을 떠나야만 했는데, 1938년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하기 전에 모나리자는 샹보르 궁으로 보내졌다.


Chateau de Chanbord
왜냐하면 루브르에서 가져온 예술품들의 선별 작업이 그곳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1939년에는 다시 루비니로 옮겨졌으나, 프랑스가 완전히 독일의 손에 들어가면서 모나리자는 수많은 피난민의 틈에 끼여 1940년 7월 록 외디 수도원을 거쳐 몽토방의 잉그르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모나리자]는 그곳에서 겨울을 보낸 후 국보급 예술품들을 실은 65대의 트럭 중 하나에 실려 몽탈 성으로 향한다. 인접해 있던 앙스의 베드폴 성과 라스티냑 성이 불타고 파괴되는 엄청난 전투를 옆에서 지켜보며 모나리자는 견뎌야만 했다.
마침내 평화가 찾아오고 [모나리자]는 루브르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1957년 1월 모나리자는 볼리비아 사람(우고 안자가 빌레가라)이 던진 돌을 맞게 된다. 기적적으로 약간 긁히는 정도로 끝났지만 잘못되었다면 지금의 모나리자의 미소를 볼 수 없었을지도... 그의 범행 동기는 경찰서의 유치장일망정 따뜻한 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싶었던 간절한 소망에서였다고 한다. 어쨌거나 모나리자의 긁힌 상처는 잘 아물었고, 여전히 신비로운 웃음으로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는 모나리자가 다빈치의 위장된 자화상이라는 가설이 제기됐으며 그간 모나리자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설 등 이 그림만큼 친근감을 주면서 많은 문제를 제시하는 작품도 드물다.



Cookie Jar (two views)


Movie Mona Gift Wrap



Mona Lisa Socks


Lid from can of quince jelly. Gift of Christine L. Sundt


Merle Nacht, 1999: contact (860) 563-7993
Illustration by Merle Nacht from article by Will Joyner.
"A Few Thousand Years of Museums, in a Nutshell,"



Postcard: Misguided Masterpieces Series


Greeting Card "Another famous face is looking great in braces."

아직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작품이라 부분적으로 다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웹상에 올려진 자료를 모아 재구성하였음을 밝힙니다.

Schubert / 미완성 교향곡


보테로가 그린 [모나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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