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의 미소”는 보는 사람에게 신비성을 느끼게 하여 많은 풍설(風說)과 함께 “모나리자의 수수께끼”로서 오늘날도 적지 않은 문학적 관심거리이다. 요컨대 이 그림은 레오다르도 다 빈치의 인간에 대한 오묘한 감정과 관능의 표현인 것이다. 이 그림의 역사적 경로에는 불분명한 점이 많아 모나리자에 대한 신비성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1503~06년 제작. 나무판 위에 유채 77*53cm. 파리 루브르 미술관 소장. 모나리자의 안색이 창백한 것에 대해 “어린 딸을 잃은 슬픔 때문이었다”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1951년 1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탄생 500주년을 기념해서 마련된 전시회를 앞두고 실험실에서 밝혀낸 결과, 얼굴의 색조가 변질된 것으로 밝혀졌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흰빛을 띈 상아빛 색조를 뚜렷하게 드러내기 위해 래커와 꼭두서니 뿌리에서 빼낸 붉은 염료로 모나리자의 은은한 얼굴빛을 그려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이것이 사라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이 초상화를 완성하기 위해 수많은 주문을 거절하기도 했는데. 그가 이 초상화에 왜 그토록 집착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밀라노, 로마, 프랑스로 옮겨다닐 때에도 '모나리자'는 언제나 그와 함께 했다. [모나리자]의 최초 소유자는 누구였을까? 프랑수아 1세는 1534년 퐁텐블로 성의 야심만만하고 독창적인 형태로 건축한 욕실 벽에 [모나리자]를 걸어놓았다. 그림을 욕실에 걸어 놓을 수가 있느냐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그 당시의 욕실은 모임의 장소이자 중요한 안건이 결정 나는 중요한 장소였다. 욕탕에는 에로틱한 신화의 주인공들을 묘사한 프레스코 벽화로 꾸며져 있었고 휴게실에는 안드레아 델 사르토, 라파엘, 티티엔의 대표작과 더불어 [모나리자]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모나리자]가 퐁텐플로의 욕실에 걸리자 버킹엄 대공(조지 빌리어즈 : 앙리 4세의 딸, 앙리에트 마리를 왕비로 맞아들이려던 찰스 1세의 특사로 파견됨)이 그림에 눈독을 들였다. 공작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예술품 애호가로 프랑스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을 손에 넣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지만, 루이 13세 측의 중매쟁이가 적극적으로 반대함으로써 [모나리자]는 프랑스 공주의 약혼 선물로서 영불해협을 건너지 않게 되었다. 다행히 공주는 [모나리자] 없이 무사히 결혼했다. [모나리자]는 1695년 태양왕의 작은 갤러리에 걸리게 되었다.
이렇게 모나리자는 프랑수아 1세와 그 신하들이 목욕하던 모습을 지켜보다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었고, 튈르리 궁전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1804년 나폴레옹은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서 약탈해 온 전리품과 더불어 모나리자를 셍-클루 성으로 보냈다. 나폴레옹은 모나리자에 애착을 가지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 후 거의 100년 동안 그 자리를 모나리자는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1911년 8월 21일, '모나리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루브르 박물관측은 그 초상화를 찾아주는 사람에게 2만5천 프랑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하고, 그 밖의 후원회에서도 5만 프랑을 주겠다, 신문사로 가져오면 4만 프랑을 주겠다 등등 보상금을 내걸었다. 당시 27살로 건물 벽에 그림을 그리던 이탈리아 화가(빈센조 페루기아)는 아주 대담한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 루브르의 정기 휴일이던 1911년 8월21일 월요일 아침 일찍 그는 살롱 카레에서 [모나리자]를 떼어내서 여유 있게 걸어나갔다. 경비원들은 사진을 찍으려는 것이라 생각하고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설마 루브르로 들어와 당당히 도둑질을 해 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페루기아가 그림을 갖고 유유히 떠나고 난 후1시간 후에야 그림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빈센조 페루기아는 어떻게 그림을 훔쳤던 것일까? 훗날 그가 자백한 범행 일체는 이러했다. 세느강 쪽으로 있는 쟝-구종 문을 통해 박물관으로 들어간 후 주형실을 지나 중앙 계단을 통해서 살롱 카레로 들어갔다. 액자를 좁은 계단에서 벗겨내고 그림만 셔츠로 둘둘 말아 감추고 다시 중앙 계단으로 올라가 르퓌엘 문을 통해 루브르 강둑으로 빠져나갔다. 페루기아는 1910년에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 박물관의 구조를 훤히 알고 있었다. 20세기에도 모나리자의 수난은 계속 되었다. 1919년 마르셀 뒤샹에게 호된 시련을 당해야 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모나리자를 이용한 그림들이 나돌았다. 그러나 모나리자를 향한 경외심은 여전했고, 2차 대전 중 파리를 점령했던 독일군 조차도 그녀를 여신처럼 떠받들었다. 독일군의 진주에 따라 모나리자는 루브르 박물관의 예술품들과 함께 긴 여행을 떠나야만 했는데, 1938년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하기 전에 모나리자는 샹보르 궁으로 보내졌다. 왜냐하면 루브르에서 가져온 예술품들의 선별 작업이 그곳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1939년에는 다시 루비니로 옮겨졌으나, 프랑스가 완전히 독일의 손에 들어가면서 모나리자는 수많은 피난민의 틈에 끼여 1940년 7월 록 외디 수도원을 거쳐 몽토방의 잉그르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모나리자]는 그곳에서 겨울을 보낸 후 국보급 예술품들을 실은 65대의 트럭 중 하나에 실려 몽탈 성으로 향한다. 인접해 있던 앙스의 베드폴 성과 라스티냑 성이 불타고 파괴되는 엄청난 전투를 옆에서 지켜보며 모나리자는 견뎌야만 했다. 마침내 평화가 찾아오고 [모나리자]는 루브르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1957년 1월 모나리자는 볼리비아 사람(우고 안자가 빌레가라)이 던진 돌을 맞게 된다. 기적적으로 약간 긁히는 정도로 끝났지만 잘못되었다면 지금의 모나리자의 미소를 볼 수 없었을지도... 그의 범행 동기는 경찰서의 유치장일망정 따뜻한 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싶었던 간절한 소망에서였다고 한다. 어쨌거나 모나리자의 긁힌 상처는 잘 아물었고, 여전히 신비로운 웃음으로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는 모나리자가 다빈치의 위장된 자화상이라는 가설이 제기됐으며 그간 모나리자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설 등 이 그림만큼 친근감을 주면서 많은 문제를 제시하는 작품도 드물다. Illustration by Merle Nacht from article by Will Joyner. "A Few Thousand Years of Museums, in a Nutshell," 아직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작품이라 부분적으로 다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웹상에 올려진 자료를 모아 재구성하였음을 밝힙니다. Schubert / 미완성 교향곡 보테로가 그린 [모나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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