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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 story/미술 이야기

보이는 것은 찰나고, 아는 것은 영원하다.

by May born JCY 2009. 4. 16.



[한겨레] [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26] 시각상과 촉각상

미술의 기능은 시각적 사실의 재현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세계 이해’를 이미지를 통해 나타내는 것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에는 화가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이 있다. 테르트르 광장이다. 이곳의 화가들은 관광객을 상대로 그림을 그려주며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이다. 이들 중에는 검은 종이를 오려 관광객의 얼굴을 묘사하는 실루엣 작가도 있다. 그의 작품은 죄다 모델의 옆얼굴만 담고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얼굴 정면을 실루엣으로 표현하면 눈·코·입의 생김새를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머리 스타일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대상의 정측면 이미지를 그린 것을 프로파일(profile)이라고 한다. 한 사람의 성품이나 약력에 대한 미디어의 단평을 프로파일이라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 미술의 프로파일은 사람의 정측면을 묘사함으로써 인물의 핵심적인 특징을 명료하게 뽑아낸 그림을 가리킨다. 서양에서는 중세 말~르네상스 무렵 이런 초상화가 많이 그려졌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에서는 이런 프로파일 그림이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양, 특히 중국에서는 오히려 정면상이 대상의 인품과 특징을 압축적으로 전해주는 대표적인 초상 장르였다. 서양에서도 정면상이 그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빈도수로 보면 중국보다 한참 떨어진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한 걸까?



동물들의 이미지를 떠올려보자. 동물들을 그릴 때 앞면과 옆면, 윗면 가운데 어느 면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먼저 말을 그려보자. 말은 일반적으로 옆에서 본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물고기는 어떤가? 그것도 옆에서 본 이미지다. 도마뱀을 그려본다면? 위에서 본 이미지가 제일 먼저 떠오를 것이다. 이렇듯 동물을 떠올리다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면이 하나씩 있다.

사람은 어떤가?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리 두 개의 경쟁적인 이미지 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고대 이집트의 벽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영국박물관이 소장한 <늪지로 사냥을 나간 네바문>의 주인공은 지금으로부터 3400여년 전에 살았던 이집트의 귀족이다. 얼굴과 다리는 측면에서 본 모습을 그린 것이고, 가슴과 눈은 정면에서 본 모습을 그린 것이다. 해부학적으로 불가능한 포즈이지만, 이 그림뿐 아니라 고대 이집트 벽화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그려졌다. 이 혼합 형식으로부터 우리는 인간이 부위에 따라 앞면이 먼저 떠오르기도 하고 옆면이 먼저 떠오르기도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정면상이나 프로파일은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해 그린 것이다. 서양에서 프로파일이 적극적으로 그려진 것은 해부학적 구조상 옆에서 볼 때 서양인의 얼굴 특징이 또렷이 살아난다는 점(한마디로 실루엣이 잘 산다는 점), 그리고 화가의 입장에서 형태의 포치(布置)에 유리해 정확한 재현을 중시하는 그들의 전통과 잘 부합한다는 점 등이 작용한 탓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인간이 두 개의 경쟁적인 이미지 면을 동시에 갖고 있는 까닭에 정면상과 프로파일 외에 동서양 모두 이 둘을 한꺼번에 나타내는 부분 측면상을 발달시켰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위에서 보았듯 고대 이집트 벽화의 경우 그런 자연스러운 방식이 아니라 정면과 측면을 편의적으로 봉합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두 이미지 면을 나타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무얼까? 일단 대부분의 벽화가 무덤 벽화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무덤 속의 주인공은 내세에서도 이승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냥하고 잔치를 벌이며 살 것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자연스런 부분 측면상으로 그려지면 그 원근 표현에 따라 사지 중 일부가 작게 그려지거나 아예 안 보일 수 있다. 그러면 그는 작은 팔을 가지고, 혹은 사지 가운데 하나 없이 내세를 살아야 할 것이다.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인체의 일부를 작게 그려 넣는 것은 원근에 따른 불가피한 시각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의 크기를 줄여 버리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불균형이요 파괴였다. 그들의 그림은 기본적으로 시각상(視覺像)을 그린 게 아니라 촉각상(觸覺像)을 그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촉각상이란 촉각적 경험이 가져다주는 이미지로, 이를테면 같은 사물이 앞뒤로 떨어져 있어 크기가 달라 보여도 만져보면 같듯 사물의 객관적 형태에 대한 인식을 상으로 나타낸 것이다. 시각상이란 시각적 경험이 가져다주는 이미지로, 같은 사물도 보는 위치에 따라 더 크거나 작아 보이듯 주체가 사물을 주관적으로 인식한 대로 상을 나타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집트 벽화는 시각상이 아니라 촉각상에 기초해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원근법적 표현에 익숙한 오늘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처럼 시각상이 아니라 촉각상에 의지해 그린 이집트인들의 표현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고금을 통틀어 사람들은 이미지를 표현할 때 일반적으로 촉각상에 기초해 표현한다. 원근법적으로 표현하는 훈련을 따로 받지 않았다면 말이다.




일례로 우리나라 민화의 책거리 그림을 보면 책장이나 탁자의 앞부분과 뒷부분의 길이가 같은 경우가 많다. 건물을 그린 그림도 마찬가지다. 보이는 대로 그린다면 뒷부분의 길이가 짧게 그려져야 한다. 하지만 결코 그렇게 그리지 않았다. 이런 사례는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고전 고대 그리스와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 철저히 시각적 경험에만 의존해 대상을 묘사하는 특수한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런 시각적 사실성이 서양미술만의 고유한 표현 양식이 되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미지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 이전에 아는 것을 전달하는 데 그 일차적인 기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말이나 글처럼 말이다. 이는 왜 시각적 사실성의 표현이 오직 유럽에서, 그것도 특정한 시기에만 발달했으며, 나아가 현대에 들어서는 추상화 등이 나타나 그 전통마저 무너져 내렸는가에 대한 답이 된다. 미술의 한층 보편적인 기능은 시각적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앎과 이해, 느낌을 전달하는 데 있다. 이를 시각적 사실성에 의지해 표현하는 것은 그 전달을 위한 수많은 방법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고대 이집트 벽화로 다시 눈길을 돌려보자. 사람을 그린 것인데도 정면과 측면의 봉합이 아니라 정면이나 측면 어느 한쪽에서 본, 사실적인 묘사를 한 그림들이 있다. 노예나 무희를 그린 그림들이다. 이처럼 노예 등 ‘차원이 낮은 존재’를 그릴 때는 시각상에 가까운 쪽으로 그리고, 파라오나 귀족처럼 ‘차원이 높은 존재’를 그릴 때는 촉각상에 가까운 쪽으로 그리는 형식으로부터 우리는 이 벽화에 ‘세계의 질서’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고유 인식이 담겨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곧 보이는 대로 그려진다는 것은 찰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요, 그것은 필멸의 운명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아는 대로 그려진다는 것은 영원한 질서의 대변자가 되는 것이요, 영생을 약속받는 것이다.

흔히 미술을 공간예술이라고 하지만, 이렇듯 미술은 단순히 시각적으로 공간을 표현하는 예술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세계 이해와 느낌을 나타내기 위해 시각 이미지를 활용하는 예술이라 하겠다.

--- 이주헌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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