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기록이 역사입니다-여수미술 아카이브
  •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문화예술
  • 행복한 삶을 위한 문화예술
■ Art story/미술 이야기

화가 배동신 _01

by May born JCY 2008. 12. 1.
(1)영혼의 선객 배 동 신
"조선의 젊은 천재 우에노에서 꽃피우다"




배 (1947) 90.5x72㎝ 유화.
 일본 하네다 공항 세관에서 한 여인과 세관원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행색으로 보아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미술작품을 여인이 소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초라한 행색으로 미루어 훔친 고가 미술품을 위장반입하려는 게 분명했다. 여인의 등엔 칭얼대는 딸이 업혀 있었고, 손엔 어린 아들이 매달려 있었다. 취조하듯 세관원이 다그쳤다.

 "이 작품들이 누구의 것인가요?"

 "제 것이에요."

 "작품을 그린 작가가 누구인가요?"

 "제 남편이에요."

 "남편의 이름이 무엇이지요?"

 "…"

 여인은 웬일인지 한참을 머뭇거렸다. 도망치듯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떠나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남편이라면서 이름을 못 대다니 훔친 게 틀림없군요?"

 생각을 정리한 여인의 입에서 이내 단호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제 남편의 이름은 배동신!"


작업중인 배동신.

 세관원은 그 즉시 한국의 미술협회로 전화를 걸었다. "배동신이라는 화가가 한국에 있습니까?" 당시 한국의 미술협회는 아직 홍익대학파와 서울대학파가 통합되기 이전인 혼란기였다. 화가의 명단이 제대로 파악돼 있을 리 없었다. 한 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건너오지 않았다.

 이런 훌륭한 작품이 초라한 여인의 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자체가 수상쩍은 일이었다. 압수하고 수사의뢰를 부탁하면 사건은 전모가 드러날 것이다. 세관원이 전화기를 막 내려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전화선을 타고 희미하게 대답이 건너왔다.

 "아, 있다네요! 지방에서 활동하는 작간데 활동이 그리 신통치 않아서 파악하는데 늦었습니다."

 명부에 기입되지 않아서 그런 작가는 한국에 없다고 말할려는 참이었는데 때마침 미협 사무실에 놀러왔던 한 화가가 남도지방에서 활동하는 화가라고 귀띔해주었던 것이다.

 세관원은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그리는 화가가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니. 그동안 통관되는 예술품을 감식해온 안목으로 봐서는 여인이 지닌 작품들은 국보급의 엄청난 작품이었던 것이다.

 여인은 배동신의 일본인 아내 ‘와타나베 마사에’였다. 한국동란 후의 엄청난 혼란과 가난 속에서 그녀는 도저히 아들과 딸을 키울 수 없음을 절감하고 도망치듯 한국을 빠져나오는 길이었다. 한국을 빠져나오면서 그녀가 챙겨온 것은 남편이 버려둔 수채화 7점과 아이들 뿐이었다.

 초라한 가방에서 발견된 이 수채화들로 인해 일본 하네다 공항은 갑자기 떠들썩해져버렸다. 기자들이 취재를 해대고 신문 방송을 통해 이 사실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공항에서의 이 사건으로 배동신은 일본에서 먼저, 그리고 한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의 신문과 NHK 등에서 여인의 짐짝에서 발견된 놀라운 그림이라며 떠들어대자, 한국에서도 깜짝 놀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의 수많은 화상들로부터 매도를 부탁 받았지만 마사에는 굳이 거절을 했다. 남편의 그림이 한꺼번에 폭발하듯 꽃피워질 때를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화상(1953) 38x27㎝ 수채화.


 일본 여인 와타나베 마사에가 배동신을 만난 것은 가와바다 미술학교 시절이었다. 마사에는 그곳의 유명한 미술교수의 딸이었다. 당시 배동신은 여수항에서 밀항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와 가와바다 미술학교에 어렵게 입학했다. 무일푼으로 건너온 그는 신문배달, 당구장 잡일 등 온갖 고생을 하며 그림공부를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43년 신인미술가의 등용문인 릫자유미술창작가협회전릮에 릫초상릮이라는 작품을 출품해 입선의 영예를 안았다. 그 그림이 우에노 미술관에 내걸리자, 당시 일본신문들은 "조선의 젊은 천재 우에노에서 꽃피다." 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한국유학생 환영회를 겸한 축하자리에서 이중섭은 아리랑을 불러 배동신의 일본 등단을 축하해주었다. 배동신의 실력과 기질이 화려한 앞날을 예고하며 선뜻 싹을 내밀던 시기였다.

 배동신의 그림을 지켜보던 마사에는 한 눈에 반해버렸다. 그림에서 그토록 투명한 집중을 그녀는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아무런 기교도 드러나지 않는데 그림은 완벽했다. 선은 꾸밈이 없으나 모든 움직임을 포착했고, 색채는 물빛이었으나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선禪과 예술이 한 몸이 돼 뿜어내는 광휘에 그녀는 눈 멀어버린 것이다. 시인ㆍ문예비평가




무등산(1968) 78x55㎝ 유화.



배동신의 몰입ㆍ열정 탄복
日 전설적 화가 호쿠사이와 비교


여인상(1954) 13x21㎝ 수채화.


일본에서 그림공부를 했기 때문일까. 흔히 배동신을 일본의 전설적 화가 호쿠사이와 비교한다. 일본에서는 1800년경에 활동한 호쿠사이에 대한 이런 일화가 흘러다닌다.

어느날 지인이 찾아와 수탉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호쿠사이는 일주일 후에 오라고 말했다. 일주일 후에 그가 다시 찾아 왔을 때 그는 다시 한 달을 연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지인이 한 달 후에 찾아 왔을 때 호쿠사이는 다시 두 달을 연기했다. 두 달 후에 왔을 때 다시 6개월을 연기했다. 매번 그런 식으로 어느덧 3년이 흘러갔다. 그림을 부탁한 사람은 기다림에 지쳐버렸다. 3년이 지났을 때 그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찾아가 불같이 화를 냈다. 호쿠사이가 다시 연기하려는 눈치가 보이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며 당장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릴 것을 요구했다.

호쿠사이는 알겠다며 그 자리에서 붓과 종이를 꺼내더니 순식간에 수탉을 그려냈다. 그것은 지금껏 볼 수 없는 최고의 명화였다. 그러자 지인은 더욱 분노하면서 말했다.

“이렇게 순식간에 그릴 수 있으면서 왜 3년이나 기다리게 했소?”

호쿠사이는 말없이 지인을 자신의 화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놀랍게도 그 화실의 사방벽과 방 안에는 지난 3년 동안 밤낮으로 습작한 수탉그림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호쿠사이의 전설은 감동적이지만 일본 특유의 과장과 인위의 모습이 배어있다. 배동신의 몰입과 열정이 호쿠사이보다 덜하겠는가? 천재성을 타고난 뒤 최고의 몰입과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배동신이 남겨놓은 지금의 위대한 작품은 나올 수가 없다.

배동신은 한 점의 수채화를 탄생시키기 위하여 수 백장의 스케치와 초상을 그린다. 어떤 화가도 그의 끝없는 습작과 준비작업을 능가하기는 힘들 것이다. 술 마시거나, 특별한 일 외의 모든 시간을 그는 작업에 몰두한다.

커다란 동양화 붓을 이용해 직접적이면서 빠른 공격을 선호하는 그의 모습은 위대한 검객이 검무를 추거나 면벽의 선객이 삼매에 몰두하는 듯한 몰아의 모습이다.

이처럼 타고난 천재성과 최고의 몰입만이 천상의 풍경을 지상까지 견인해낼 수 있는 것이며, 의식의 내부 가장 깊숙한 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영혼의 세계를 화판에 인양해낼 수 있는 것이다. 타고난 천재성과 끝없는 숙련만이 눈 앞에 보여줄 수 있는 천상의 세계와 영혼의 기척, 우리는 이제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

(2)영혼의 선객 배동신
日 여인과의 사랑은 불타오르고…
日미술대전서 입상 천재성 입증
결혼반대에 나주로 사랑의 도피
산천 담아내며 '남도시대' 개막


2004년 여수 자택에서 배동신(왼쪽)씨가 부인(가운데)과 함께 찍은 사진.

일본의 부유층 미술 여학도 와타나베 마사에가 빠진 곳은 사랑의 불구덩이였다. 예술가의 사랑방식은 말릴 수 없는 결행인 것. 식민지국 천재를 향한 마사에의 사랑이 그러했다. 배동신의 그림에 시선이 가 닿는 순간, 영혼이 먼저 숨막힐 듯한 속도로 달려나가 가슴에 부딪히고 질식해버렸다. 극도의 어려움에 빠져 익사해가고 있는 식민지국 청년의 손을 순식간에 나꿔채고는 펄쩍 뛰어오른 뒤, 현실 바깥으로 튕겨나가 차가운 나락에 함께 나뒹굴어 버린 것이다.

절박한 사랑은 대부분 불행의 뇌관 위에서 시작되는 것. 그 뇌관마저 사랑을 위한 장식처럼 보이는 법. 지배국 상류층의 딸과 가난한 식민지국 청년 사이엔 사랑의 전율 뿐, 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모든 악조건을 물리치고 두 사람은 즉각 동거에 들어갔다.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 배동신과 마사에 사이에 낳은 첫째 아들 ‘용’이었다. 마사에의 부모는 아연질색했다.

한국 유학생들은 연일 축제분위기를 이어갔다. 당시 한국인에게 ‘자유미술창작가협회’의 입상이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며칠의 고민 끝에 동신의 실력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천재였던 것이다. 실력 앞에서 정치력은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장 1952년 34 x 25Cm. 유화

일본의 신문이 '조선의 천재 우에노에서 꽃 피다'라고 대서특필하자 억눌려오던 한국 유학생들은 자부심으로 뭉쳤다. 당시 일본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유학하고 있었다. 이중섭, 강용운, 양수아, 박고석, 신상옥 등 울분을 안고 있는 한국의 유학생이 20명이 넘었다. 입선 축하자리에서 이중섭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아리랑을 불렀다. 고화흠(원광대 전 미술대학장) 씨에 의하면 한국 유학생들은 그 전엔 거의 모임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각자 학비조달을 위한 신문배달 등의 온갖 잡일로 만남의 시간을 가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배동신의 입상은 그 와중에서도 이들의 정신을 결집하는 계기가 됐다. 이때부터 서로의 사정을 살피고 도우며 정보를 나누기 시작했다. 당시 미술유학생들에게는 물감 등의 화구가 극도로 부족했다. 흰색이나 푸른색 물감을 선호하는 사람은 붉은 물감이나 녹색이 남아돌았으므로 이것들을 서로 나누는 방식들이 생겨났다. 종이를 구하기 힘들었으므로 자연스레 다른 화판을 구하는 방법이 모색되기도 했다.

몇 달째 하숙비를 못내던 배동신에게 유학생들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굶주림과 극도의 미술재료 결핍에 시달리던 배동신에게 이들의 후원은 다소나마 안정과 위안이 됐다. 이 시기에 배동신은 중요한 기법 하나를 발견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림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던 그가 새로은 세계에 눈뜬 것이다.


소녀상(1954) 45 x 40Cm. 유화

그 무렵,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던 수채화의 새로운 기법이 들어왔다. 수채화의 물맛과 자연스런 번짐을 배동신은 발견하고는 흠뻑 빠져들었다. 배동신만의 ‘영혼의 번짐기법’을 익힌 때가 이때다. 이 어려운 시기에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하는 자신만의 ‘수채화 순수기법’을 터득하고는 갈고 닦기 시작한 것이다.

드디어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시작되었다. 동경의 하늘엔 ‘B 29’기가 굉음을 내며 날아다녔고, 길 복판에 수시로 폭탄이 떨어졌다. 그곳에 머물던 한국인들은 배표를 구하기 위해 한꺼번에 항구로 몰려갔다. 하지만 배표를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동거중이던 배동신과 마사에도 위기감을 느꼈다. 당시 두 사람은 마사에의 부모에게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날마다 대문 앞을 서성거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부모의 결혼반대는 너무나 완강했다. 당시의 위기상황에서 식민지국의 가난한 화가를 사위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딸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전쟁통에 잃었다고 생각하면 된다며 박정하게 문을 걸어잠궜다. 반대가 심할수록 두 사람의 사랑은 불타올랐다.


적의(赤衣)의 여인 1964. 62 x 40Cm. 유화

사랑에 눈 먼 두 사람은 전쟁의 폭격을 피해 필사적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구한 배표를 들고 짐짝처럼 배의 밑창에서 숨죽이며 한국에 도착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전쟁의 폭격과 부모의 결혼 결사반대를 피한, 사랑의 도피행. 1945년 2월 그렇게 그들은 나주 금천면에 어렵게 신혼살림을 펼쳤다. 친형이 그곳에서 조그만 과수농장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주에 도착하자 맨처음 배동신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금정산이었다. 남도의 산하가 아늑하면서도 활짝 펼쳐져 그의 천재적 조형성에 불을 지른 것이다. 그는 단박에 화구를 펼치고 남도의 산하부터 그려대기 시작했다. 배동신의 남도시대가 열린 것이다.

시인ㆍ문예비평가


<그때 그 순간>나주 금정산ㆍ광주 무등산 '평생의 정신적 지주'

배동신은 남도의 산을 많이 그렸다. 나주의 금정산과 광주의 무등산은 평생의 정신적 소재였다. 폴 세잔이 세인트 빅토리아 산을 수십점 그렸다면 배동신은 남도의 산을 수백점 넘게 그렸다. 또 그 산들의 드로잉 작업은 1000점도 훨씬 넘을 것이다.

세잔의 빅토리아 산이 아름다운 조형의 산이라면 배동신의 무등산은 투명한 영혼의 산이다. 세잔의 산이 완벽한 평면이라면, 배동신의 산은 단단한 정신의 뼈대를 갖춘 입체적 산이다.

세잔의 산과 배동신의 산을 비교해보면 배동신이 얼마나 위대한 화가인가를 단박 알 수가 있다. 그의 놀라운 드로잉 솜씨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일으킨다. 어떻게 화판에 저런 영혼의 뼈대가 세워질 수 있는가. 무등산을 그릴 때 그는 산에서 그리지 않았다. 그가 가장 완벽하게 조망할 수 있는 장소는 월산동 복판의 한 지점이었다. 그는 이곳을 찾기 위해 수없는 발품을 팔았다. 그가 이곳을 고집하는 이유는 시야의 완벽한 조형성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스케치를 하고 때로는 이젤을 펼쳐서 직접 작업도 했다. 이 때문에 생긴 일화는 무수히 많다.

그가 이곳에 화구를 펼치면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이 부근이 그 시절에는 색주가였는데 이 색주가의 여인들이 주요 관객들이었다. 그녀들은 때로는 먹을거리를 가져오기도 하고 심지어 모델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는 잠시 무등산 작업을 접어두고 그녀들을 직접 드로잉했다. 그리고는 스케치북을 쭉 찢어서 그녀들에게 선물했다. 그녀들에게 배동신은 ‘행복한 화가 할아버지’였다. 그 숱한 드로잉들이 지금 살아 넘쳐서 우리들을 행복하게 하고 있다.

언제부턴가는 그 지점에 화구를 펴면 월산동 파출소 직원이 나와 거리 정리를 해주곤 했다. 그곳이 점차 번잡해지면서 교통이 막히기 때문이었다. 교통이 막힐 망정 그들은 그림을 방해하지 않았다. 차들은 파출소직원의 안내를 받아서 먼거리를 돌아서 지나갔고, 지나던 사람들은 잠시 멈춰서서 숨죽이며 무등산의 탄생을 바라보곤 했다. 70년대 남도는 이처럼 아름다운 예향이었다.

그가 영혼의 붓대에 수채를 묻혀 직선으로 문지르면 무등산의 투명한 뼈대는 화판 위에 부빙(浮氷)처럼 피어난다. 집중의 시선으로 빨아들인 순열(洵悅)한 산 하나가 가슴에 잠겼다가 생명의 물감을 뒤집어쓰고는 화판 위로 툭, 튕겨져나오는 것이다. 그 산은 갓 태어난 무등산이다.


======================================

(3) 영혼의 선객 배 동 신
"피었다 스러지는 저녁노을을 어찌 사고 판다는 말이냐"
46년 10월 광주ㆍ전남 최초 개인전
전시회는 실패…혹평에 되레 호통




무등산(1975) 79x55㎝. 유화.
 배동신의 남도시대는 나주 금천에서 시작됐다. 일본인 아내 마사에와 첫 아들 '용'을 위해서는 당장 생계를 부칠 곳이 필요했다. 다행히 형들이 금천에서 과수원을,
영산포에서 연탄공장 일을 관계하고 있었다. 그곳에 우선 생계를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고국에서의 첫 시절을 나주와 영산포를 오가며 보냈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그는 남도의 풍광에 단박 반해버렸다. 생활이 척박할수록 남도의 산하는 더욱 수려한 자태로 가슴을 두드렸다.
그 내면은 들여다볼수록 순하고 내밀했으며 기품은 맑고 단단했다. 그 순간 기름기 넘치는 유화로는 남도의 뼈대를 그려낼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을 쳤다.
퍼뜩, 일본 유학시절 직접 실험하고 간직했던 물맛 습윤한 수채화가 떠올랐다.

황포돛배 떠가는 나주의 영산강, 그 아련히 순정한 맛을, 그 위에 그림자처럼 드리우는 영혼의 산들을 어떻게 기름기 번지는 유화로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남도의 산과 강은 그들의 내면이 변주하는 음(音)중, 가장 낮은 음에 이마 기대고 귀 기울이는 자에게만 몸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영혼의 눈과 귀로 응시하지 않으면 좀처럼 가슴 열어 빛의 투명한 골격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었다. 배동신은 기름기가 제거된, 맑고 수척한 수채화만이 남도의 산하를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을 그 곳에서 맞았다. 날마다 남도 풍광의 계단을 걸어 내려가 함께 꿈꾸고 대화하는 내면의 세계와는 달리 바깥세상은 너무 시끄럽고 참혹했다.

조국해방은 미국의 힘으로 이뤄졌고, 세계는 소련과 미국의 두 강국 구조로 갈라져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욕망의 힘이 동방의 조용한 나라까지 뒤덮은 것이다.


누드(1959)64X45cm 유화

지상에 몸을 기대고 있는 한, 예술가라고 해서 이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한국화단은 가치관이 설정되지 않아서 우왕좌왕하며 허둥댔다. 친일과 반일, 친공과 반공으로 나뉜 이념분쟁의 도가니였다. 당시 광주ㆍ전남 화단은 20명이 넘는 일본유학파 화가들의 활동으로 활발한 양상을 띠었다. 1945년 12월에는 광주중앙초등학교 강당에서 '동서양화 합동전시회'가 열렸다. 목포에서는 1946년 목포미술원을 목포시 죽교동에 열었으며 태평양 미술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돼 녹영회(綠影會)를 창립해 그해 광주에서 첫 전시회를 가졌다.

배동신도 나주와 영산포를 오가며 그린 작품들과 일본시절 그렸던 그림들을 모아 1946년 10월 광주도서관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주로 수채화였다. 미술전람회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절, 그의 개인전은 해방 이후 광주ㆍ전남지역에서 가진 최초의 개인전으로 기록됐다. 물감이나 화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극도의 가난 속에서, 한 없는 사랑과 열정만으로 그려낸 수채(水彩)의 진수들이었다.



사과(1975)39.5X27cm 유화

전시회의 반응은 참혹했다.

"수채화도 그림이냐?" "배가 덜 고팠군!"

"저렇게 옅은 물감으로 죽죽 그어대는 그림이야 애들 장난이지."

서양화라고 하면 구상계통의 유화만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광주지역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림은 물론 단 한점도 팔리지 않았다. 애초에 팔려고 전시회를 연 것은 아니었다. 내면과 영혼의 공유를 위해 전시회를 가졌을 뿐이었다.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린다며 비웃는 사람들에게 배동신은 오히려 호통을 쳤다.


80년대의 작가모습.

"이놈들아, 그림을 어떻게 사고 팔 수 있단 말이냐? 너희들은 잠깐 피었다가 스러지는 저 아름다운 노을을 사고 팔 수 있느냐? 저 깊고 푸르게 우렁우렁 울어대는 무등산의 울음소리를 사고 팔 수 있느냐? 자연이란, 아름다움이란, 풍광의 영혼이란, 개인의 소유가 아닌데도 어떻게 사고 팔 수 있단 말이냐!"

배동신이 그리는 산하는 욕망의 눈으로는 결코 바라볼 수 없는 천상의 자태인 것이다. 그 자태들은 무욕의 시선 앞에서만 선뜻 옷을 벗고 알몸을 드러내준다. 그러므로 그의 수채화는 돈 앞에 옷 벗는 기생의 교태기를 철저히 증류한 순정한 자태다. 감동은 그곳에서 터져나오는 것이다. 그곳은 미세한 욕망의 번뇌도 용납지 않는 선객의 청렬한 정신의 집이다. 시인ㆍ문예비평가



<그때 그순간> 무위ㆍ무욕ㆍ영혼을 그린 '수채화가'
■ 조상훈 조상훈치과 원장



진료실의 배동신 작품 앞에 선 조상훈 원장. 우측은 부친 조동희 화백의 무궁화 작품.



화가이신 부친(월봉 조동희ㆍ한국화가ㆍ76)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늘 그림을 가까이 하며 자랐어요. 그러다가 10여년 전 광주 예술의 거리를 우연히 나갔다가 그곳의 화랑에 나와있는 무등산 그림 한점을 발견하고는 단번에 반해버렸어요.

당시엔 배동신 화백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기 이전이었어요. 누구의 작품인가 여부를 떠나서 한 30여분을 혼이 빠져 그저 망연히 들여다보았어요. 어떻게 산을 이렇게 단순한 선으로 정교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그저 붓에 긁힌 듯한 마티엘 하나에도 수천 번의 계산이 숨어있었고, 흘린 듯 입혀놓은 가벼운 색채에도 빛나는 천재성이 숨어 있었어요.

나중에야 배동신 화백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는 무릎을 쳤죠. 역시 배동신이구나! 그때까지 막연히 배동신이라는 화가는 수채화가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 작품은 유화였어요. 그런데도 전혀 유화냄새가 나지 않았고, 영낙없이 수채화 맛이 나는 거에요.

그때서야 왜 배동신 화백을 수채화가라고 부르는지 알았어요. 그 분은 무슨 재료를 쓰든지간에 정신의 수채화를 그려낸다는 것을. 그분의 모든 작품은 동물성이 아니고 식물성이라는 것을, 인위가 아니고 무위라는 것을, 욕망이 아니고 무욕이라는 것을, 육신이 아니고 영혼이라는 것을.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작품의 값 여부를 떠나서 무작정 구입할 수밖에 없었어요. 우물쭈물 망설이는 사이, 다른 사람이 구입해가버린다면 언제 다시 이 맑은 행복감을 맛볼 수 있을까 생각하니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죠. 작품을 포장해서 집으로 가져온 그날 밤, 아내와 아이들에게 한없는 자랑을 늘어놓았죠. 행복이란 이런 것이구나, 마니아란 이렇게 해서 생기는 것이구나, 그때 깨달았죠.

그 뒤로 배동신 화백의 작품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어요. 보면 볼수록 기가 막히는 거에요. 그 분의 작품만 대하면 이상하게도 정신이 맑아지면서 안정감이 오대요. 그때서야 나는 천재화가라는 말이 왜 생겨났는지를 알았죠. 천재는 언제나 타인에게 감탄을 불러일으켜 뇌에서 저절로 도파민이 철철 넘치도록 하는 사람들이더군요.

이 사과작품을 보세요. 사과를 이렇게 그려내는 화가는 세계에서 배동신 화백 뿐일 거에요. 폴 세잔 역시 세인트 빅토리아 산과, 사과를 수 없이 그렸지만 이런 투명한 정신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어요. 한국의 배동신은 지금 당장 세계 최고의 미술판에 내놓아도 단연 압도적으로 돋보일 겁니다. 적어도 실력면에서 만큼은요.

모든 작품 하나하나에 보석같은 물맛이 배어있잖아요. 그렇게 하나 둘, 모은 작품이 어느새 20점이 훌쩍 넘었네요. 그런데 이렇게 뛰어난 천재의 작품을 저만 보기가 아깝데요. 그래서 요즘엔 인터넷에 작품을 한 점 한 점, 올리고 있어요. 인터넷이야말로 모두가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갤러리가 아니겠어요? 좀 멋을 내느라 인터넷에 그림을 올릴 때, 언어학자 소쉬르의 이름을 빌려, 그곳에서 제 이름은 소쉬르로 통하지요.


==========================================

(4)영혼의 선객 배동신
'유목적 삶' 살았지만 인생 전부는 그림 뿐
광주여고 떠나며 남긴 이임사
"너희들이 싫어하니 갈란다"
가식없는 인삿말에 '까르르'





1946년에 배동신은 광주서중학교 미술교사로 초청되었다. 당시 광주 서중출신이 주축이 된 학도호국단의 부탁을 받아 포스터 등을 그려주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서중학교는 제대로 된 학교체제가 갖춰지지 않은 곳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정상수업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다시 전남여자고등학교(구 욱고녀)로 옮겨가고 말았다.

그곳에서 그는 특이한 차림새와 자유분방한 태도로 학생과 교사들의 눈길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언제나 청바지 차림으로 출근을 했다. 지금처럼 제대로 된 청바지가 아니고 그저 헐렁한 푸른 색 작업복 바지였다.

더구나 교실에 들어올 때면 문으로 들어오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창문을 훌쩍 뛰어넘어 들어오곤 했다. 당시 전남여고는 단층으로 된 허름한 건물이었는데 창문을 뛰어넘으면, 교실문까지 빙 돌아야 하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식없는 그의 태도와 뛰어난 미술실력으로 그는 여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모았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일은 터지고 말았다. 그날은 개교기념일이었다. 축하공연을 위해 연극무대를 꾸미는 일을 미술교사인 그가 맡았다. 바자회를 열고 있는 교정을 지나는데 때마침 화우인 김인규가 그곳에 놀러왔다. 당장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낮술을 마셔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마시다보니 어느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정물(1961). 62x40㎝ 유화.


그때서야 무대장치가 생각난 그는 황급히 달려가 보았다. 그러나 연극은 이미 막이 내린 뒤였다. 일그러진 교장의 얼굴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1년간의 전남여고 교사생활을 낮술과 함께 마쳤다.

이런 식으로 1948년에는 순천사범학교, 1949년에는 진도중학교, 1950년에는 영암중학교 등으로 옮겨 다녔다. 그는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미술교사 생활을 했지만 태생적으로 규격 속에 얽매일 수 없는 성격이었다.

규격과 체제가 그를 가둘수록 그는 그림과 술 속으로 달아났으며 매번 현실과의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술과 현실과의 간격은 피안과 진흙탕처럼 엄청났다.

진도중학교에서 근무하던 시절이다. 어느날 학교에 출근을 하지 않자 동료교사가 집으로 찾아왔다. 마당에 들어서자 배동신의 단벌 옷이 빨랫줄에 걸린 채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결근했느냐고 묻자 입고 나갈 옷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전날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시궁창에 빠져 옷을 빨아 널었는데 옷이 마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방문을 열고 나오는 배동신은 아내의 고쟁이 옷을 입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고쟁이 입고 학교에 출근할 수는 없잖은가! 뭐가 잘못됐는가?"

동료교사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 가난하던 시절, 일본인 아내 마사에는 동신과 동신의 그림을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낯선 나라, 진도까지 내려와 갖은 고생을 겪고 있었다. 벽돌 나르는 등의 막일까지 하며 남편을 위해 문예춘추의 화집을 사주기도 했다. 그런 그들의 생활을 소문으로 훤히 알고 있는 학생들은 수시로 집을 드나들며 나무도 해주고 고추장 된장 등도 가져오곤 했다.



숲길을 산책하는 작가. 1974년.


이런 생활을 겪으면서 그는 많은 학교를 옮겨다녔다. 당시엔 화가가 드물었으므로 미술교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미술교사들은 짚차를 타고 여러 학교를 다니며 시간강사를 하기도 했다. 시간강사를 광주여고에서 3개월여 하다가 그만 둘 때였다.

월요일 아침조회시간, 운동장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구령대 위에서 이임사를 하라고 교장이 권유했다. 배동신은 그저 몇걸음 앞으로 걸어나가더니 구령대에도 오르지 않은 채 구부정한 자세로 학생들을 향해

“너희들이 싫어하니 나 갈란다.”

간단히 말하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털끝만한 억지 위엄이나 가식이 없는 태도에 학생들은 실소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배동신의 칠성계는 유명했다. 그와 조규일 양규철 등이 주동이 돼 이뤄진 계모임이었는데 목수, 토수, 순경, 양동시장의 양복장수 등이 그 멤버였다. 그저 모여서 술 마시는 게 목적이었다. 각자의 직업을 떠나서 친목이 목적인 단순하고 순수한 모임이었다. 형, 아우의 전라도 말인 '성-동상'계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런 생활을 꾸려가면서도 그는 수많은 그림을 그려냈다. 그에게 삶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에게 본질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당시 한국의 미술계는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선전(鮮展) 이후 새로운 미술계를 확립한다는 차원에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창설됐다. 그러나 시작부터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친일색채 시비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친일도 반일도 중간자도 아닌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의 생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상이나 색채나 기교나 조직 등이 그에게는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는 오직 그림을 그릴 뿐이었다. 영혼의 보금자리인 피안의 세계를 척박한 현실 위에 그리는 일이 절박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의 순진무구한 세계를 비웃듯 거대 욕망과 음모의 실체인 한국동란이 발발했다.




누드. 38x27㎝ 유화. 1975년.


시인ㆍ문예비평가



<그때 그순간>수채화가 강 연 균
"올곧은 성미탓 지독히도 가난한 삶 병환까지 겹쳐 여수서 외로운 생활"



광주의 한 주점에서 그 시절을 회고하는 강연균 화백. 왼쪽은 이정재(광주무등중학교 미술교사)씨.

한국의 수채화는 대구의 이인성과 양달석 등에 의해 최초로 시도되었지요. 시작은 그랬으나 배동신이라는 거장의 홀연한 등장으로 수채화의 발화지는 남도땅 광주가 되고 말았어요. 수채화의 맛을 극대화시킨 분이 바로 배동신 화백이지요. 그 분은 산 등의 풍경을 그릴 때면 수채를 쓰면서도 단단한 골격을 심어넣었고, 사과나 배 등의 정물을 그릴 때면 투명한 물맛을 자아내곤 했어요. 남도의 풍광과 어우러지는 남도 수채화의 기틀을 세웠다고 할 수 있지요.

그분이 초대 ‘전남 수채화 창작가협회장’을 맡았고, 이어서 ‘한국 수채화 창작가 협회장’을 맡아 이끌어갔어요. 한국수채화단의 원로이시죠.

70년대 초반, 광주 충장로 2가의 명성제과점 2층에 로댕 화실을 내고 있을 때였어요. 시내에 나오실 때면 간간히 들리곤 하셨는데 이것저것 지적을 하시곤 했어요. 나도 수채화를 하는 사람이라 그 분의 작품을 관심있게 살피곤 했는데 좋은 점은, 재빨리 취해서 내것으로 만들곤 했지요. 그럴 때면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어허, 모방하지마! 자기 것을 그려야지!” 하면서 호통을 치시는 겁니다.

물론 같은 수채화를 하면서도 정반대의 작품세계를 걷고 있지만, 당시엔 그런 보이지 않는 암투같은 것이 있었어요. 그 분의 그림을 들여다보면 가는 긁힘자욱이 많이 보이는데 이것이 굉장한 입체감을 주더군요.

그 분은 다 닳은 붓의 양철 끝으로 살짝살짝 긁어 극도의 효과를 내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어볼 요량으로 나는 본격적으로 못을 사용해 보았어요. 그런데 역시 제대로 된 맛이 나지 않더군요. 그래서 나는 그 기법은 포기해버렸죠. 그래서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그 분은 제 그림을 싫어했어요. 내심이야 저도 좀 섭섭하죠.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 그분인데 말이죠.

그 분과 서울에서 전시회를 마친 뒤 함께 돌아오는 기차 안이었어요. 차창을 바라보며 연신 감탄을 하는 겁니다.

“어이 연균이, 저 아름다운 풍경들을 좀 봐. 정말 황홀하고 기가 막히잖아. 저것들을 그려야 된다니까! 아, 이 아름다운 산하의 풍광들이 얼마나 갈 수 있을지 나는 그것이 걱정이네.”

아름다움에 대한 경외감에 들떠 소년처럼 흥분을 하는 것이었어요. 그분은 그야말로 천성이 소년이었어요. 그 분은 평생을 가난 속에서 사셨는데, 전혀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었어요. 당시 수채화는 그림 취급을 받지도 못하는 상황이었고, 더구나 그 상황에서 대중의 시선을 눈꼽만큼도 의식하지 않았으니 가난이야 필연적이었지요.

같은 수채화를 하면서도 그러나 내 소신은 다르지요. 대중의 눈은 정직하고 정확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대중을 무시하는 것은 오만한 태도지요. 대중에게 아부해서도 안되겠지만 너무 무시하는 것도 예술가로서 불손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그 분이 언젠가 본의 아니게 도전 심사위원을 맡은 적이 있어요. 그 시절 내 화실에 와서 불편한 속내를 털어놓는 겁니다.

“어이, 이런 나쁜 놈이 있는가! 평소에는 인사도 않던 놈이 내가 도전 심사를 맡았다고 멸치 한 포대를 들고 왔지 뭔가. 이것이 그림을 잘 봐달라는 짓거리가 아니고 뭐겠는가. 그래서 내가 들고 온 멸치 포대를 확 던져버렸네.”

그 뒤로는 관전이나 미전에는 참여 안하셨죠.

90년대에 제가 시립미술관장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저를 찾아오셨더군요. 그 분이 몹시 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던 시절이었어요. 화가는 그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인데 그림이 안 팔리니 배고픈 것은 당연한 일이죠. 때마침 미술관에 그림구입비로 책정된 예산이 조금 있어서 500만원짜리 그림을 구입해드린 적이 있었어요. 몹시 고마워하시더군요.

“연균이 자네 같은 사람 없네.”

그처럼 순수하고 천진한 분이었어요. 그런 그 분이 광주에 이어서 서울생활을 정리하고는 여수로 내려가셨어요. 여수로 내려가신 뒤 몹시 외로우셨고, 지금은 병환까지 겹쳐서 정말 안타까워요. 차라리 광주에 머무르셨으면 말년이 덜 외로우실 텐데 말이죠. 광주라는 풍토는 화가의 선후배 관계가 가장 돈독한 곳이니까요.

더구나 그 분은 일반인보다는 화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시거든요. 실력과 인격이 완벽히 겸비되지 않고서야 화가에게 존경받는 화가가 되기는 쉽지가 않지요. 결국 그림이란 자기 확인이며 완성을 향한 외로운 경주입니다.

====================================

(5)영혼의 선객 배동신
가난한 남편이냐 아이들의 장래냐 '번민의 세월'
아내 마사에, 끝내 일본으로 떠나고…
'남편의 영혼' 오롯이 담긴
수채화 몇작품 간직한 채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 1982년.
전쟁 앞에서 예술가는 가장 무력하다. 화가의 천적은 전쟁이다. 6ㆍ25 전쟁 중 많은 화가들이 납북되거나 실종됐다. 일부 좌익계 화가들은 자진 월북하기도 했다. 남한을 점령한 인민군들은 화가들을 동원해 김일성 초상을 그리게 하거나 스탈린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 그러다가 다시 국군이 서울을 수복해 남도까지 진군하면 부역자 색출을 하느라 눈에 핏발을 세웠다.

밤과 낮을 교대로 인민군과 국군의 세상이 뒤바뀌는 극도의 혼란기가 지속됐다. 순수한 감성과 창조력만이 가진 것의 전부인 화가에게 전쟁은 지옥보다 참혹했다. 이 시기에 배동신은 일본 유학시절에 그렸던 초기의 빛나는 그림들을 모두 잃었다. 소중하게 간직했던 유학시절의 화우 이중섭 등과 찍었던 사진들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무등산. 1968년 75x55cm 수채

그에게도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지만 일본인 아내 마사에가 겪는 시련은 더욱 혹독했다. 점령군이 바뀔 때마다 국군과 인민군에게 수시로 불려다니며 문초를 당해야 했고, 생활능력이 없는 화가를 남편으로 둔 탓에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다. 전쟁통인데도 붓만 붙들고 있는 남편을 위해 과일을 팔기도 하고 날품팔이를 하기도 했다. 배고픔에 보채는 아들과 딸을 달래가며 시장통과 공사판 등을 전전했다. 그때가 광주의 장동 강용운의 사랑방 한칸을 빌려 쓰던 시절이었다. 식구들 모두가 한 방에서 기거를 할 땐데도 동신은 그림을 멈추지 않았다.



목포항구. 1968년 39.5X27cm .수채

작은 방 한 칸을 둘로 나눠 커텐을 치고 작업실로 사용했다. 그런데 문제는 작업실로 수시로 친구들을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양수아·강용운 등이 수시로 드나들며 술을 사다 날랐다. 당시 전남일보 옆의 그 유명한 오센집에 이어 그곳은 제 2의 도깨비대학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을 대하는 태도는 매순간 진지했고 긴장감은 팽팽했다. 그가 쩔쩔매며 앓을 때는 현실에서 영혼으로 의식의 기어가 변속되지 않을 때였다. 영혼의 집을 짓는데 현실의 재료들은 너무 무거운 것일까. 그는 그림 앞에서 당혹감으로 진땀을 흘리곤 했다. 그럴 때면 현실의 모든 것이 작업의 방해물들이었다. 그가 더욱 두려움에 떨 때는 그토록 시시해 보이던 남루와 굶주림이 자꾸만 속악해지라고 부추길 때였다.

그때마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붓을 놓고 황급히 술병을 추켜들곤 했다.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의식의 기어를 세상 바깥쪽으로 변속시켜 놓아야 했으므로. 그렇지 않으면 그와 함께 어깨 겯던 피안과 진실이라는 동료를 잃어버리기 십상이었으므로.

그에게 삶이란 그림의 세계가 열릴 때까지의 시간을 기다려내는 일이었다. 그림이 열린 뒤, 그림 속에 피어나는 피안의 아름다움이 순간임을 직시하는 잔혹함이었다. 더욱 두려운 것은 지상의 모든 색이 딱딱하고 거짓된 색이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바람이 자연 속에 풀어놓는 선이며 색채며 리듬감을 자신의 그림이 더욱 싱싱하게 추월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가 술을 마실 때는 이런 것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때였다. 지상에 버려져 있음에 몸서리치며 진정한 피안이 그리워 술을 찾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화판을 펼치고 붓을 들면 순식간에 모든 잔혹한 현실들이 물러난다. 이내 캔버스 가득 거대하고 투명한 영혼의 집이 태어난다. 화폭이 서서히 희부연해지며 피안과 현실의 경계가 드러난다.



크로키. 1976년 .수채

본격적으로 의식이 변속돼 영혼의 색채가 화폭에 살얼음처럼 발릴 때 그는 드디어 자신감에 차올라 윗통을 벗어부친다. 비로소 그의 영혼이 침착해진다. 천천히 순간에서 순간으로 유영하는 끊임없는 유동성의 빛깔들이 화폭에서 피어난다. 도약하는 색채와 빛들의 혼융. 화폭에 도저한 피안의 흐름에 넋을 싣고 그곳으로 유영해 들어간다. 마침내 살아있는 지극한 순간이 심연의 심저에 가 닿는다.

색채의 갈피를 헤치며 관객과 화가가 함께 진실을 몽유해가는 어느 순간, 의식은 세상 바깥으로 튀어나가 버린다. 몸도 정신도 사라져버린 뒤, 정전. 이곳은 완벽한 삼매다. 우리는 모두 이곳에서 비롯됐던 것이다. 비로소 생명의 자궁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러한 화가의 작업 앞에서 현실의 고통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마사에는 영혼의 열락과 치욕같은 현실의 고통 앞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날마다 자라났다. 전쟁은 끝났다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에 있었다.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공사판에 나가 벽돌을 나르며 그녀는 조금씩 비행기 삯을 모으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앞날을 생각하면 귀국만이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귀국을 결행하기로 결심한, 한국에서의 마지막 날 밤, 그녀는 가지고 갈 아이들의 옷 등을 챙기다가 작업실 한 켠에 버려둔 남편의 수채화 몇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가와바다 유학시절의 그림보다 한결 눈부신 그림들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그녀는 그 그림들을 짐 속에 소중히 챙겨넣었다. 남편의 혼을 간직한다는 심정으로. 그렇게 날이 새자 아이들의 손을 이끌고 귀국행 비행기에 홀연 몸을 실어버린 것이다.

시인ㆍ문예비평가


추상화가 우제길

■그때 그 순간- 추상화가 우제길
"그의 넓은 예술세계는 사모님의 눈물이 절반"

"제길이, 자네가 최골세, 역시 최고야!”

연신 흥겨워 하십디다.

나도 그림을 하지만 그림 그릴 때 그처럼 끙끙 앓는 분도 드물어요. 그런데도 남기신 작품 수가 많다는 것은 얼마나 그림 속에 빠져서 사셨는지 짐작케 하지요.

제가 광주전업미술가협회를 창단했어요. 그해, 이 지역 전업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남도예술회관에서 전시회를 가졌는데, 그때 어떤 연유로 출품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배동신 선생님의 작품이 한점 출품됐습디다. 10호 짜리 정도의 '나부'였던 걸로 기억해요. 전주에선가 오신 분이 배선생님의 그림을 좋아해서 제가 팔아드린 적이 있는데, 1000만원 미만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사모님과 통화를 했는데 사모님이 몹시 고마워하시더구만요. 그때 이미 선생님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앓고 계실 때지요. 물론 그 전부터 선생님은 그림 외의 것은 거의 백치수준이시니 사모님이 몹시 고생이 심하실 수밖에 없어요. 선생님 댁에 가서 술을 얻어마신 적이 여러번 있는데 집에서는 대단히 폭군이세요. 그런 선생님의 어리광을 사모님이 다 받아주십니다. 선생님의 깊고 넓은 예술세계는 사모님의 눈물이 절반이라고 보면 맞아요. 사모님이 선생님을 위대한 예술가로 만드신거지요.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100% 이해하고 신뢰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으면 순수의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 법이거든요. 지금, 병환을 앓으시면서도 사모님껜 늘 큰 소리를 치신다는데 그것이 예술가의 기백이고 그 믿는 구석 때문에 순수성에서만큼은 늘 자신감이 넘치는 겁니다. 그런 사실을 사모님은 훤히 읽고 계시니까, 그 예술가의 외로운 어리광을 다 받아주시는 거지요. 선생님이 무등산을 그리는 월산동의 그 지점, 지금은 MBC 건물이 들어섰습니다만, 그곳에서 사모님은 양산 받치고 서 계시고 선생님은 무등산을 그리시던 그 아름다운 광경을 나는 언제까지나 잊지 못합니다.

정말, 선생님은 예술적 깊이에서나 예술가적 기질면에서나 남도가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대단한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이제껏 그 분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 분의 순수성 때문이지요. 당신의 작품을 드러낼려고 애쓰거나 작품관리나 마케팅 등은 아예 안하셨죠. 그 당시야 무슨 마케팅이 있었겠습니까마는.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어요. 중국미술시장이 거품인줄 알았는데 작가들의 오리지널리티가 확고하다보니, 이제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잖아요? 이제는 배 선생님 뿐만이 아니라, 모든 작가들이 프로정신을 가져야 해요.

남도화단은 누가 뭐래도 세계미술계의 숨어있는 보물창고예요. 눈 밝은 화상이나 수집가들의 렌즈에 초점이 맞춰지면 당장 세계미술의 판세는 달라집니다. 이 땅에 개성있는 화가들이 얼마나 많아요. 바야흐로 미술시대가 열렸어요. 남도화단의 선, 후배들이 손을 잡고 프로정신을 바탕에 깐 뒤 큰 굿판을 자주 벌려야 할 때지요.


===========================================================================================

http://www.jnilbo.com/section_list.php3?section=215&total_record=71&page=2에서 펌글한 내용입니다.

- 김현석의 남도예술 100년 기사 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