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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 story/옛그림보기

예술품을 수집하던 사람들

by May born JCY 2006. 10. 8.
조정육의 옛그림 읽기

[옛그림읽기] 《간송탄생 백주년 기념전 》 단상



▲ 조영석, <현이도>, 비단에 채색, 43.3×31.5cm, 간송미술관

얼마 전에 끝난 간송미술관 전시회는 여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특히 이 번 전시는 《간송탄생 백주년 기념전 》이라 국보급에 해당되는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더욱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국보 제72호), <금동삼존불감>(국보 제73호)를 비롯하여 <청자상감포도동자문매병>(보물 제286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 <청자오리형연적>(국보 제74호) 등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불상, 도자기가 전시되었다. 또한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의 <미인도>, 정선의 <경교명승첩>, 장승업의 <삼인문년도>, 김정희의 <명선>, 김홍도의 <마상청앵> 등은 우리 한국회화사를 대표하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런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도록 한 사람이 바로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이다.

그는 우리 문화재가 파괴되고 약탈되던 일본강점기에 전심전력을 다 해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고 보존한 사람이다. 우리가 어려운 역사를 겪은 상태에서 이만큼이라도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간송같은 선각자들이 있었기때문이다.

처음에 책 모으는 것을 취미로 시작했던 간송이 본격적으로 문화재 수집에 뛰어든 것은 주변에 눈 밝은 스승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의 휘문 고보 시절 미술 교사였던 춘곡 고희동(1886-1965)을 비롯하여 친척이었던 월탄 박종화(1900-1981), 그리고 우리 민족의 지도자였던 위창 오세창(1864-1953) 등의 스승들이 있었다. 특히 오세창은 이 시기에 우리 나라의 역대 서화사를 총망라한 『근역서화징』을 출판하여 간송의 의욕에 불을 지폈다. 작품을 수집하고 감정할 때마다 옆에서 조언을 해 준 분이 바로 당대의 최고 감식안이었던 오세창이었다. 그러니까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들은 그 시기의 최고 안목들의 눈을 거쳐 엄선된 최고 작품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후에도 간송의 주변에는 손재형(1901-1981), 최순우(1916-1984), 황수영(1918-현재), 진홍섭(1918-현재), 김원룡(1922-1994) 등과 같이 고미술계를 대표하는 문화인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러니까 간송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은 한 시대의 문화사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간송의 문화재 수집은 단순히 수집한 작품을 감상하기 위한 목적보다도 민족 문화를 지켜야 된다는 사명감과 절박함이 자리하였다. 나라를 빼앗긴 상태에서 정신마져도 빼앗겨서는 안된다는 위기감이었다. 때문에 그는 아무리 많은 돈이 들더라도 구애받지 않고 물건을 구입했다. 1943년 봄에 『훈민정음』(국보 70호) 원본을 구입하기 위해 1만 1천원을 지불했다. (당시 큰 기와집 한 채 값이 1천원이었다.) 영국인 법률가가 수집해 놓은 우수한 고려자기를 매수하기 위해 한걸음에 동경으로 갔던 얘기도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인재양성을 위해 폐교 위기에 놓인 보성중학교를 인수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결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우리 문화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밑거름이 되고자했던 그의 의도는 미술사와 고고학을 위해 『고고미술』을 창간한 것에서도 읽을 수 있다. 간송은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난 부자였고 부자가 돈을 어떻게 써야 되는가를 보여 준 모범답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사임당, <포도>, 비단에 수묵, 21.7×31.5cm, 간송미술관
그런데 이 번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 중에서 예전에 이 작품을 소장했던 사람의 흔적이 적혀 있는 작품이 몇 점 있었다. 신사임당의 <포도>와 조영석의 <현이도>, 그리고 이광사의 <층장비폭도>와 김명국의 <송하문동도> 등이 그것이다. 간송에 앞서 이 그림을 소장했던 사람이 바로 조선시대 최고의 감식가이자 수장가인 석농 김광국(1727-1788이후)이다. 현재 《해동명화집》이란 이름으로 수장되어 있는 이 그림첩에는 모두 22점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해동명화집》은 조선 시대 최고의 안목이 점찍어 놓은 작품을 거의 2백여년 뒤의 최고의 감식가가 발견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김광국은 중국과 조선의 그림은 물론이고 일본의 우끼요에와 베네치아 판화까지도 수집할만큼 국제적인 시각을 가진 수장가였다. 그가 이렇게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직업과도 무관하지 않다. 대대로 의관직을 지낸 중인 가문 출신이었던 김광국은 두 차례의 연행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그림을 판단하는 정확한 안목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의관과 역관을 비롯한 중인들의 서화수집활동은 거의 경쟁적이라 할 만큼 적극적이었다. 비양반이었던 중인들은 실무능력을 바탕으로 부를 이루었고 이를 토대로 양반들이 누렸던 문화를 그들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김광국과 같은 대 수장가가 등장하게 되었다.

김광국이 이렇게 당대의 안목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인 분위기에 힘입어 이른 나이에 그림 보는 훈련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는 10대 후반 때부터 그보다 28살 많은 상고당 김광수(1699-1770)의 문하에 드나들며 서화를 품평하였다. 영조 때 참판을 지냈던 김광수는 정선, 조영석, 심사정, 이인상, 강세황 등의 문인화가들과 교유하면서 작품을 소장하였다. 가까이에서 김광수를 지켜 본 김광국이 그림을 소장하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초기에 왕공사대부들의 개인적 취미에서 시작된 서화 수집 취미가 조선 후기에 이르면 김광수같은 중인들까지 앞다투어 서화 고동, 금석수집에 열중하게 된다. 그러니까 조선 후기에 예술품을 완상하고 수장하는 것은 당시의 문인들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교양이 된 것이다. 때로는 그 현상이 지나쳐서 남공철같은 선비는 “어렸을 때부터 서화벽이 있어 명품을 파는 것을 보면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라도 샀고, 좋은 그림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반드시 찾아 가서 감상”하였다고 한다. 또한 명문집안의 자제였으면서 정치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을 서책과 고동서화를 수집하는데 정력을 바쳤던 이하곤 역시 “서적을 혹독히도 좋아하여 누가 책을 파는 것을 보면 옷을 벗어서라도 그것을 구입”할 정도였다. 그들 모두 그림을 구하기 위해 꼭 옷을 벗어 주었는 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사대부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했던 옷을 벗어서라도 그림을 사려고 했던 간절한 마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토대 위에서 김홍도같은 전문적인 화가가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이후 장승업같이 개성 강한 직업화가가 활동할 수 있는 화단이 형성될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후원자의 관계. 그 형태는 시대에 따라 변해 왔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진리가 그 속에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좋은 안목을 가진 후원자가 좋은 화가를 만든다는 것이다. 안견이란 화가를 만든 사람이 안평대군이었고, 정선이란 화가를 키운 사람이 영조였다. 그런가 하면 김홍도같은 불세출의 화가를 발굴해 낸 사람은 정조대왕이었다. 이렇게 주군과 신하의 관계가 아니라 할지라도 때론 친구가 화가의 후원자가 될 때도 있었고 때로는 저자거리에서 가게를 기웃거리던 익명의 보통 사람이 후원자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든 화가를 키우고 길러주는 것은 후원자의 눈이었다.

후원자의 안목이 높을 때 화가는 그 수준에 맞는 작품을 제작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작품을 완성해도 그 작품을 알아주는 눈이 없을 때 화가들은 쉬이 절망에 빠진다. 물론 당대에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사후에야 높게 평가받는 천재화가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안목있는 후원자가 화가의 작품을 알아보았을 때 그 시대의 문화는 더욱 풍요로워진다. 김광국과 전형필같은 후원자가 살았던 시대는 그러므로 화가들이 행복한 시대였을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어떤 후원자가 있는 지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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