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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 story/옛그림보기

한국인에게 활쏘기는 어떤 의미였을까

by May born JCY 2006. 10. 8.
조정육의 옛그림 읽기

무용총의 <수렵도>와 김홍도의 <활쏘기>



▲ )<무용총 수렵도>, 고구려, 5세기경, 중국 지린성 지안현 무용총 주실 서벽

우리 민족은 활쏘기의 명수들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을 ‘동쪽(東)의 활, 즉 궁(弓)을 잘 쏘는 사람(人)’이란 뜻으로 동이족(東夷族)이라 불렀다. 한반도에서 삼국이 형성되기 훨씬 전부터 이 땅의 사람들은 활을 옷처럼 걸치고 다녔다. 그 때의 한가락하던 솜씨가 자손들의 유전인자에 그대로 새겨져 있어 지금까지도 그 전통이 계속되고 있다.

올림픽에서 한국의 양궁 남녀 대표팀이 금메달을 휩쓸다시피 한 것은 그런 튼튼한 혈통 때문이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한국에서는 모든 초등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양궁을 하게 하느냐’는 외신 기자들의 질문이 있었을까. 피는 못속인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활쏘기는 고대에는 생존을 위해서 필연적으로 할 수 밖에 없었고, 조선시대 이후가 되면 선비들의 최고의 헬스 종목이었다. 그 과정을 그림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고구려 고분벽화

말을 탄 사냥꾼 세 명이 깊은 산중에서 사냥을 하고 있다. 중앙에 호랑이를 쫓는 사냥꾼을 중심으로 위 아래로 사슴을 쫓는 사냥꾼이 배치되어 있다. 말과 호랑이, 그리고 사냥개까지 모두 오른쪽을 향해 있어 운동감과 통일성을 부여했다. 그러면서도 맨 위쪽 사냥꾼이 몸을 뒤로 돌려 반대편 방향으로 달아나는 사슴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자칫하면 단조로울 수 있는 그림 속에 변화를 주었다. 이 그림이 전시장에 걸어 놓기 위한 그림이 아니라 무덤 주인을 위한 고분벽화임에도 불구하고 화가는 본능적으로 구도가 어떠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모르긴 해도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기막힌 구도감각을 지닌 사람이었을 것이다.

무용총의 <수렵도>를 그린 이 화가는 어지간히 ‘뻥이 심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말과 사슴, 호랑이와 사냥개들은 거의 가로로 뻗어버리기 일보 직전인 듯 다리를 쫙쫙 벌리고 있다. 맹렬하게 추격하는 사냥꾼과, 화살을 피하기 위해 목숨 걸고 내달리는 사냥감의 추격전을 실감나게 전달하려는 화가의 의지가 담겨 있다. 현장감을 생생하게 전해줄 수만 있다면 그까짓 뻥이 문제겠는가.

이 그림을 보게 될 무덤 속 주인은 지그재그로 배치된 사냥꾼과 동물, 그리고 주름진 산을 보는 동안 자신이 살아 생전 수 없이 쏘았던 화살을 떠올릴 것이다. 그의 몸은 이미 식은 지 오래되었지만 그의 기억은 그림이 지워질 때까지 영원할 것이다.

이 그림은 마치 역원근법으로 그린 듯 맨 앞에 있는 사냥꾼이 가장 작게 그려졌고 점차적으로 뒤로 물러날수록 인물이 크게 그려졌다. 실제로 중간에 있는 사냥꾼과 맨 뒤에 있는 사냥꾼의 크기가 비슷한데도 뒷사람이 더 크게 느껴진다. 그것은 서양적인 원근법에 익숙해진 눈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다.

고구려 사람들은 특히 활쏘기를 잘 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어릴 적부터 말타기와 돌던지기 그리고 활쏘기를 능숙하게 할 줄 알았다.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 즉 주몽이 신궁(神弓)이었으니 그 밑에 있는 신하들의 솜씨가 웬만해서는 명함도 못 내밀었을 것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이렇게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게 된 데는 환경적인 영향이 가장 컸다. 그들의 활동무대가 주로 험악한 산악지대와 대초원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민족들의 끊임없는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돌무지를 쌓아 놓고 돌 던지기를 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영혼이 사는 무덤 속에 특별히 수렵도가 그려지게 된 배경에는 수렵이야말로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활쏘기야말로 생존을 위한 최고의 도구였던 것이다.

김홍도, <활쏘기>, 종이에 담채, 27×22.7cm. 국립중앙박물관

생존의 도구에서 스포츠로의 변모

고구려 시대의 활쏘기가 생존의 도구였다면 조선시대의 활쏘기는 어느 새 체력단련을 위한 스포츠로 변모되었다. 김홍도의 <활쏘기>를 보면 그런 시대 변화를 잘 느낄 수 있다.전복(戰服)을 입은 교관이 한 선비에게 활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 옆에서는 활과 시위를 손질하며 자신의 차례가 되기를 기다리는 교육생이 두 명 더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등장하는 그림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꼭 필요한 대상만이 들어가 있을뿐 이 곳이 풀밭인지 건물 옆인지 전혀 설명이 없다. 그림을 그릴 때 붓질을 더하기보다 덜어내는 것의 중요성을 알았던 작가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4 용지보다 조금 더 작은 화면에 그저 네 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을 뿐인데 조금도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김홍도가 현장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현장감을 표현해내는 데 천재적인 기질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 천재성은 거의 본능적이라 말할 수 있다(김홍도의 노력을 과소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작가로서의 능력에 손색이 없을 때 할 수 있는 찬사이다).

그는 잡다한 주변 설명대신 각 인물들간의 긴장관계를 통해 현장감을 드러내고 있다. 세 부류의 인물들은 마치 활처럼 삼각형으로 배치되어 있어 화면이 동적이다. 이런 동적인 느낌은 세 인물들이 갖고 있는 활과 화살의 방향에 의해 각각 바깥으로 퍼져 나간다. 즉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눈은 활과 화살을 따라 화면이라는 좁은 공간을 벗어나 바깥으로 바깥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이다.

<씨름도>에서 관중들의 시선을 중앙에 있는 씨름꾼들을 향해 모이도록 했다면 <활쏘기>에서는 바깥으로 유도했다. 그 때문에 똑같은 크기의 화면에 그린 그림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에서 받는 느낌은 ‘집중’과 ‘분산’으로 완전히 달라진다. <씨름도>는 씨름꾼을 향한 의도적인 집중을, <활쏘기>는 화살이 날아갈 화면 밖을 향한 계산된 분산을 생각하며 그린 그림이다. 또한 <씨름도>에는 의도적인 집중에서 오는 답답함을 바깥을 쳐다보고 있는 엿장수를 통해 풀어냈고, <활쏘기>에서는 바깥을 향해 각각 따로 놀고 있는 세 인물들을 전복을 입은 교관으로 묶어두고 있다.

즉 세 인물을 그린 붓질과 색깔이 똑같은 무게를 지녔다면 교관의 갓과 옷에만 짙은 옷을 입혀 안정감을 느끼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활쏘기>에서의 주인공은 맨 왼쪽에서 활을 겨누고 있는 선비가 아니라 마치 전복을 입은 교관 같다는 느낌이 들게 된다. 마치 <씨름도>에서의 주인공이 두 씨름꾼이 아니라 엿장수인 것처럼 느껴지듯이.

이 외에도 <활쏘기>에서 맛볼 수 있는 재미는 네 명의 주인공 얼굴일 것이다.

“제가 누누이 강조하지만 활쏘기에서는 정신집중이 중요해요. 두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안되고 몸과 활과 과녁이 일체가 되도록 정신통일을 해야 되요. 턱을 너무 들어서도 안되고 얼굴을 현쪽으로 쫓아가시면 안됩니다. 지금 몸이 너무 앞으로 나갔지요? 활을 몸으로 끌어 당겨서 얼굴에 살이 붙도록 하세요!”

교관의 지시는 끊임없이 계속된다. 엉덩이를 뒤로 뺀 채 몸이 앞으로 쏠린 궁사는 마음처럼 따라 주지 않는 자신의 몸이 마뜩찮은 듯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양쪽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자세를 교정해주고 있는 교관의 목소리는 근엄하기 그지 없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열심히 가르치려는 스승과 성적이 부진한 학생 사이의 심리가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그 곁에서 한쪽 눈을 감고 화살을 들여다 보고 있는 사람과 활을 조율하고 있는 대기자의 표정이 무심하다. 아무런 배경 설명 없이 조선시대 스포츠 센터의 내부 상황을 이보다 더 실감나게 보여주는 작품이 있을까?

이렇게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스포츠가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너무 철학적인 작가들에게 단순한 놀이를 형상화한다는 것이 형이하학적으로 보여서일까? 아니면 부조리한 현실을 고민하기도 바쁜데 이런 스포츠를 그린다는 것이 무의미해서일까? 요즘 우리 그림에는 더 이상 <활쏘기>가 들어 있지 않다. 그 말은 이제 활쏘기는 골프나 축구같이 인기 있는 스포츠가 아니고, 우리 생활 속에서 밀려나서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러나 웰빙 바람으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는 황토집이나 된장처럼 활쏘기도 언젠가는 우리 화가들의 그림 속에 다시 등장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장점을 잊고 있을 때도 우리의 DNA는 여전히 그 기억을 잊지 않고 있다가 올림픽이 열릴 때면 내공의 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시 그려지게 될 <활쏘기> 장면. 그 장면은 어떠할까. 생각만 해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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