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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 story/옛그림보기

겨울을 인내하며

by May born JCY 2006. 10. 8.
조정육의 옛그림 읽기

[옛그림 읽기] 김시의 <한림제설도>와 김정희의 <세한도>



▲ 김시,<한림제설도>,1584년, 족자, 비단에 담채, 53×67.2cm, 클리블랜드 박물관

긴 겨울이다. 산과 들과 지붕은 회색빛을 머금은 채 추위에 떨고 있다. 그런데 살아가다 보면 겨울이 추운 것이 단지 날씨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인생이라는 고달픈 길목에서 만나게 되는 추위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더욱 얼어 붙게 만든다.

부유했던 집안이 어느 날 갑자기 풍비박산나거나,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저히 데워질 것 같지 않은 추위를 느끼게 된다. 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게 되었거나 몹쓸 병에 걸렸을 때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적인 추위를 느끼게 된다. 그 추위는 이전의 삶이 행복하면 할수록 더욱 더 통렬하게 뼈 속을 파고 들 것이다.

봄은 언제쯤 오는 걸까

겨울의 추위는 봄과 여름의 기억 때문에 더욱 모질게 느껴진다. 온통 사계절이 추위뿐이었다면, 따듯했던 봄날과 뜨거웠던 여름에 대한 추억이 없었다면, 아무리 매서운 추위라도 그다지 춥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원래부터 날씨가 그러려니, 하면서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따듯했던 시간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김시(金禔: 1524~1593)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선비화가다. 그는 문장의 간이 최립(簡易 崔笠: 1539~1612)과 글씨의 석봉 한호(石峯 韓濩: 1543~1605)와 더불어 당시 삼절로 이름을 떨쳤다. 조선 초기의 강희안에 이어 조선 중기에 절파화풍을 확립한 김시는 그 생애가 매우 드라마틱하다. 그는 가장 따뜻한 봄과 가장 혹독한 겨울을 겪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봄날의 정원에서 쫓겨나 면도날같은 추위에 행복을 잘린 것은 그의 나이 14살 때, 바로 장가가는 날이었다. 그의 아버지 김안로가 너무 지나치게 권력을 휘두르다 잡혀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그 날이 바로 김시의 장가가는 날이었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전부 김안로를 간신배라 욕했지만 김시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단지 권력만 탐하는 사람이 아니라 서화에 대단한 안목을 지닌 분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통해 김시는 서화에 대한 안목을 기를 수 있었다.

특히 아버지가 쓴 책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는 조선의 화가들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화가들까지 언급되어 있는 아주 귀한 자료였다. 즉 조선, 중국, 일본의 화가 90명에 대한 평가와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몽계필담(夢溪筆談)』같은 화론이 종횡무진으로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론적인 학습은 아버지가 열심히 수집한 서화를 직접 보면서 체계화되었다. 웬만한 사대부집 자제들조차도 평생가야 구경 한 번 하기 힘든 명화들을 아버지는 부지런히 수집하셨다. 그것이 모두 김시의 화풍의 바탕이 되었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귀양살이 도중 사약을 받아 세상을 떠난 후 김시는 비로소 세상 인심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식도 없어 양자를 들였다. 관직에도 나아갈 수 없어 두문불출했다. 그 인고의 시간을 그는 오로지 서화에만 몰두해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우뚝 섰다. 그는 특히 명대 화원들이 즐겨 쓰던 절파화풍(浙派畵風)에 뛰어났지만 꼭 한가지 화풍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 <한림제설도(寒林霽雪圖)>는 그의 그림 경향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표작이다. 또한 결코 녹록치 않은 그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마치 조선 초기의 안견의 <사시팔경도>를 옆으로 길게 확장한 듯한 이 작품의 구도에서 김시의 전통에 대한 고집을 읽을 수 있다. 그림 왼쪽 상단에는 ‘萬曆甲申秋養松居士爲安士確作寒林霽雪圖’ 라고 적혀 있는데 ‘만력 갑신년 가을에 양송당 거사가 안사확을 위하여 한림제설도를 그렸다’는 뜻이다. ‘만력 갑신년’이면 선조 17년(1584)으로 김시의 노년에 해당된다. 그림을 그린 시기는 가을인데 겨울에 눈이 소복히 쌓인 모습이다. 겨울도 되기 전에 이미 그의 마음 속에는 눈이 내렸다. 아마 그의 삶 속에서 오랫동안 녹지 않은 눈이었을 것이다.

폭설과 추위로 꽁꽁 얼어붙은 지리한 겨울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봄을 기다리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봄은 언제쯤 오는 걸까. 정말 오기는 오는 걸까.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

조선시대 화가 중에서 인생의 부침을 가장 심하게 겪은 화가를 한 명만 추천하라면 아마도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명문 대가집에서 태어난 그는, 24살 때 중국에 가서 완원, 옹방강 같은 내노라 하는 학자들의 인정을 받을 정도로 탁월한 학문적 깊이를 자랑했다. 55세까지 거침없이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정쟁에 휘말려 늦은 나이에 제주도에 유배를 가서 8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야만 했다.

어디 그 뿐인가. 제주도 유배가 풀린 지 3년도 지나지 않아 66세라는 노구를 이끌고 북청으로 또 다시 유배를 떠나야 했다. 물론 북청 유배는 제주도 시절만큼 길지 않아 1년 만에 끝이 났지만, 그 때부터 71세 때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는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말하자면 추사 김정희의 정치적, 사회적인 활동 시기는 55세가 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정희,<세한도>, 1844년, 종이에 수묵, 23.3× 146.4cm, 개인 소장


그러나 예술가로서의 김정희의 생애는 오히려 제주도 유배시절 이후부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좋은 교육을 받았고, 부지런한데다 지적인 욕구가 누구보다 강했던 추사였던 만큼 유배 이전의 작품이 매우 그 격이 높았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유배 이전까지의 글과 그림이 그의 수승한 재주에서 표현되었다면 유배 이후의 작품은 온전히 가슴에서 쏟아져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유배 이전의 글씨에는 한 번도 좌절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의 자신감과 기름기가 묻어 있었다.

그러나 유배 이후의 글씨에는 삶의 쓰라림을 견뎌낸 자의 처절한 자기확신이 잠겨 있다. 그 자기 확신은, 결코 자신의 운명이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기막힌 현실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그래도 생명을 버릴 수 없어 목숨을 이어가야만 했던 자의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날카로운 추위와 매서운 바람 속에서 한라산 고목처럼 세월을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추사체가 완성되었다.

그런 김정희의 신산스런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작품이 <세한도(歲寒圖)>이다. 이 세한도는 1844년, 그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4년 째 하던 때에 그린 작품이다. 그의 제자인 이상적(李尙迪: 1803~1865)이 중국에서 새로운 자료를 보내주자 그에 대한 감사함을 치하하고자 그린 작품이다.

김정희는 <세한도> 발문에서, 세상 사람들이 온통 권세와 이익만을 좇는데, 어렵게 구한 책을 권세도 없고 이익도 없는 ‘바다 밖의 초췌하게 말라서 몰락한 사람’에게 주었다고 고마워했다. 그 고마움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 라는 공자(孔子)의 『논어』를 인용하여 그림으로 형상화하였다. 즉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 내내 시들지 않은 것이라서,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도 한결같이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요,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한결같이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이지만, 성인이 특별히 날씨가 추워진 뒤에 이를 일컬은 것’은 세상의 인심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화려했던 생활을 마감하고 절해고도에서 버림받은 사람으로 살아야 했던 추사의 유배 생활이 어떠했는지는 절친한 벗 권돈인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 중에서 자세히 찾아볼 수 있다.

“이 죄인은 더위에 지치고 장기(瘴氣: 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기)에 지친 나머지 (중략) 다만 하나의 완둔한 목석일 뿐입니다. 거미와 지네는 예전과 같이 사람을 괴롭히고, 또한 파리도 무척 많아서 아침에 갈아입은 옷이 저녁이면 마치 검은 물을 뿜어놓은 것처럼 까맣게 되며, 밤이 되면 벼룩과 모기가 서로 득실거려서 잠을 이룰 길이 없습니다. 또 무슨 벌레인지 모르겠으나, 혹 붉기도 하고 검기도 하며 마치 먼지처럼 자잘한 벌레들이 있어서 날카로운 독침이 가시 같고 벌침 같은데, 이것들이 이부자리 사이에 서로 득실거리면서 내 몸의 피와 살을 저들의 생계로 삼고 있습니다. (후략)”

그렇게 살아야만 했던 ‘완둔한 목석’ 김정희는 온갖 벌레에 물리고 병마에 신음하면서 죽기만을 기다렸다. 그 황량하고 절망적인 상황속에서 <세한도>를 그렸다. 그러니까 <세한도>는 세상 인심에 대한 분노이면서, 한결같은 이상적에 대한 감사임과 더불어 자신의 자화상과도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추운 겨울 날, 허름한 초가집 곁에 서 있는 큰 소나무는 추사 자신을, 그리고 작은 소나무는 이상을 의미할 것이다. 먹을 최대한 절제해서 그린 이 작품은 스산한 겨울 분위기가 잘 살아 나도록 메마른 갈필로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김시와 김정희가 각각 자신의 감정을 그림으로 형상화했을 때 그들은 가장 고전적인 표현법을 사용하였다. 김시의 <한림제설도>에는 조선 초기의 안견 잔영이 남아 있고 김정희의 <세한도>에는 중국의 황공망, 예찬으로 이어지는 남종화법에 맥이 닿아 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그들이 좋아했던 화풍을 자신이라는 그릇 속에 담아 낼 줄 알았다. 그 속에서 겨울 추위는 녹아들어 어느 덧 봄을 예고할 수 있었다. 그 봄은 비록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찾아들지 못했어도 미술사 속에서 화려하게 꽃이 피었다. 그리고 그 꽃은 한국미술사가 씌여지는 한 계속 피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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