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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 story/옛그림보기

자아를 찾아 나선 선조들의 그림

by May born JCY 2006. 10. 8.
조정육의 옛그림 읽기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와 함윤덕의 <기려도>



▲ 강희안, <고사관수도>, 15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 23.4× 15.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리 선조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이 혼탁해졌을 때 어떻게 했을까. 내가 발딛고 있는 곳이 바로 내 뼈를 묻을 곳일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문득 그 장소가 낯설어지고 급기야는 나를 타인처럼 밀어낸다. 그렇게 어처구니 없고 막막했을 때 그 분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그림이 바로 강희안(姜希顔:1417~1465)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이다.

번거로운 일상을 떠나서 자연으로 -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덩굴풀이 죽죽 뻗어 내린 암벽 아래서 한 선비가 턱을 괸 채 바위 위에 엎드려 있다. 그는 지금 잔잔하게 멈추어 있는 물을 바라보며 깊은 명상에 잠겨 있다.

아무런 급한 볼 일이 없다는 듯 초탈한 자세로 한가로움을 즐기고 있는 이 처사(處士)의 모습에서 세속적인 욕망이나 집착을 찾아 보기는 어렵다. 세상사를 떠나 강호(江湖)를 찾은 처사의 얼굴에는 복잡한 세상을 벗어난 자의 여유로움과 해방감이 깃들어 있다. 이런 처사의 모습은 당시 선비들의 지향점이 어디였는가를 말해준다. 처사란 꼭 벼슬한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설령 벼슬을 하지 않았다 해도 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을 일컫는다. 모범이 될 만하다는 것은 벼슬이나 부귀영화로 이름을 날렸다는 것이 아니라, 높은 지조와 인품으로 시대를 초월하여 후세 사람들의 귀감이 된다는 뜻이다.

자신이 벼슬할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았던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강호는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고 회복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그러나 그 곳은 실재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라 말할 수 있다. 혼탁한 세상에 섞여 살면서 뜻하지 않게 자신의 의지와는 상반된 행동을 해야만 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을 잠시 털어 내고 자신만의 세계에 오롯이 들어 앉을 수 있는 곳. 그 곳이 강호였다. 번거로운 속세를 떠나 강호에 파묻혀 은둔생활을 하며 유유자적하게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은일지사의 풍류가 아닐 수 없다.

유교적인 이상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던 조선시대에는 그들의 이념에 맞는 모범적인 인물상이 필요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그들의 모범이 될 만한 인물상과 고사를 주제로 한 그림이 숱하게 많이 그려졌다. 즉 도연명(陶淵明), 왕희지(王羲之), 죽림칠현(竹林七賢), 이태백(李太白), 주렴계(周濂溪), 소식(蘇軾) 등 세속에 뜻을 두기보다는 숭고한 세계를 지향했던 인물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었다.

선비들은 역사속의 그들의 모습 속에서 자신들의 이상화된 모습을 찾았고, 여차하면 그들을 흉내 내어 살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풍류를 알았던 은일지사들이 선비들의 멘토였던 것이다.

그런 수요 속에서 조선시대 중기 이후 탁족도(濯足圖: 발 씻는 그림), 관폭도(觀瀑圖: 폭포를 구경하는 그림), 독조도(獨釣圖: 혼자 낛시하는 그림), 어부도(漁夫圖: 어부가 물고기를 잡는 그림),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 어부와 나무꾼이 대화하는 그림), 기려도(騎驢圖: 나귀를 타고 가는 그림) 등의 산수인물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는 이런 산수 인물화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고 할 것이다.

강희안의 호는 인재(仁齋), 자는 경우(景愚)로 집현전직제학과 호조참의를 지냈다. 시서화 삼절로 일컬어지는 그는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48세 때 등에 생긴 악창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줄곧 순조로운 관직생활을 보냈다. 그는 풍류에 뛰어나고 덕과 재주를 갖추었으면서도 화려한 것을 싫어하고 번잡한 것을 피했다. 성격은 침착하고 과묵하고 겸손했을 뿐만 아니라 너그럽고 원만했다고 전해진다. 젊어서부터 글 읽기를 즐겼으며 부귀영화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그의 동생 강희맹(姜希孟)도 시서화 삼절로 이름을 얻었다.

그의 그림 재주는, 어렸을 때 담이나 벽에 손이 가는대로 붓을 휘둘러도 모두 법도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천부적이었다. 그러나 ‘서화는 천한 기술로 후세에 전해지면 욕이 된다’ 하여 그림 재주가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런 그의 태도는 기술보다는 도(道)를 중시했던 유교적 입장의 반영이라 할 것이다.


함윤덕,<기려도>, 16세기, 비단에 담채, 15.6× 19.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매화를 찾아서 - 함윤덕의 <기려도>

당나귀가 힘에 겨워 곧 쓰러질 듯이 지쳐 있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나귀의 모습이 금새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등 위에 앉은 주인의 무게가 나귀의 작은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무리인 듯 나귀는 비실거린다. 그런 나귀의 고충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귀 등에 앉은 선비는 미소까지 지어가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나귀를 탄 인물은 유유자적한 처사의 모습을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이다.

그러나 나귀를 탄 인물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그를 두고 죽림칠현 중의 한사람인 완적(阮籍)이라 말하고, 어떤 사람은 그를 맹호연(孟浩然: 689~740년경)이라 했다. 완적이라 주장하는 사람은, 완적이 동평태수가 되어 나귀를 탔다는 기록을 근거로 내세웠고, 맹호연이라 우기는 사람은 평생 벼슬을 하지 않은 맹호연이 봄이 되면 나귀를 타고 매화를 찾으러 설산에 들어갔다는 기록을 지적했다. 그런가 하면 그를 소식(蘇軾) 또는 두보(杜甫)라 말하는 이도 있다. 소식이나 두보가 나귀를 타고서 시흥에 잠긴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런 저런 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시인과 화가들은 나귀를 탄 주인공이 맹호연이란 쪽에 가장 많이 공감한 듯하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들 어떠랴. 단지 그들은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라 그들의 이름으로 추정될 뿐 매화를 찾으러 떠나는 풍류객이라면 누구나 나귀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굳이 매화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해도 시흥에 취해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이라면 그도 해당될 것이다.

함윤덕이란 작가는 조선 중기의 활동했다는 것 이외에는 생애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이다. 부족한 자료 때문에 그의 생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기려도> 한 점을 남김으로써 조선 초기에 강희안이 찾고자 했던 이상화된 선비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정신은 이불해(李不害), 이경윤(李慶胤), 김명국(金明國) 등의 작품을 통해 조선 중기에 이어지게 된다. 아울러 그 뒤를 이은 정선(鄭敾), 윤덕희(尹德熙), 심사정(沈師正), 장승업(張承業) 등의 화가들도 선배들이 좋아했던 선비의 모습을 결코 놓치지 않고 자기화 할 수 있었다.

정신 없이 바쁜 일상. 자신을 되돌아 볼 겨를도 없이 흘러가 버리는 시간들. 그러다 고개를 들어 달력을 보니 어느 새 12월이다. 아무 것도 해 놓은 것이 없는데,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는데 세월은 잘도 흘러 간다. 어린 시절에는 아무리 잠을 자도 시간이 멈춰 있는 것 같더니, 서른 고개를 넘고 마흔 언덕을 넘고부터는 그야말로 세월이 화살처럼 빨라지기 시작했다. 새 해가 시작하는가 싶었는데 어느 새 다음 해가 등 뒤에 서 있다. 시간은 나이에 비례해서 눈덩이처럼 속도를 내며 굴러간다.

이렇게 시간이 정신 없이 혼자 내달릴 때 한번 쯤 선배들이 취했던 모습을 닮아서 흉내를 내보는 것이 어떨까. 굳이 매화꽃을 찾지 못해도 좋다. 시상이 떠오르지 않고 빨리 처리해야 할 세금계산서만 떠올라도 괜찮다. 그렇게라도 자신을 찾아 떠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다시 돌아와 일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몸이 피곤하면 휴식이 필요하듯 마음이 피곤할 때 잠시 동안 쉬어 주는 것은 결코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리라. 한 계절의 끝에 서서 더 이상 넘길 달력이 없어졌을 때가 되면 잠시 쉬자. 그래서 중세 농노보다도 더 심하게 부려먹은 몸과 마음이 회복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줄줄 아는 여유를 가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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