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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 story/옛그림보기

씨름, 그 신명나는 세계

by May born JCY 2006. 10. 8.

조정육의 옛그림 읽기

각저총에서 김홍도까지



▲ <각저총의 씨름도>, 고구려, 6세기경, 주실동벽, 만주 집안현

고구려 각저총의 씨름도

주황빛이 감도는 나무 아래서, 웃통을 벗어부친 두 역사(力士)가 서로의 허리춤을 휘어잡고 힘 대결을 하고 있다. 다부진 몸매. 꽉 다문 입술.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선과 팽팽한 장딴지에서 오랫동안 몸만들기에 전력해온 씨름꾼의 힘을 느낄 수 있다.

현재 상황은 씨름이 한참 진행된 듯 거칠게 힘겨루기를 하던 두 역사가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 중이다. 짧지만 마지막 힘을 쓰기 위해 상대방의 빈틈을 찾는 순간의 긴장감이 두 사람의 구부린 등줄기를 타고 흘러 내리고 있다. 그 곁에서 심판을 보던 정장 차림의 노인은(비록 얼굴을 상실했지만) 언제 터질 지 모를 흥분된 순간을 기다리느라 지팡이를 쥐고 있는 손에 땀이 맺혔다. 심판관의 머리 위로는 하늘을 상징하는 주술적인 문양이 그려져 있다.

윤곽선이 전혀 없이 채색으로만 그려진 몰골법의 나무와, 뚜렷한 윤곽선으로 표현된 근육질의 몸매가 대조를 이루면서 씨름장의 열기는 한껏 고조된다. ‘손바닥 위에 주먹밥을 올려놓은 듯한’ 나무 가지 사이로 축 쳐진 검은 새들이 걸려 있다. 빨래줄의 집게처럼 걸쳐져 있는 새들의 모습은, 강서대묘의 늘씬한 주작이나 집안현 5호묘의 균형잡힌 삼족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이 떨어진다. 그림의 주제가 씨름인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기 위한 배려였을까. 아님 아직 나무나 새에 대한 개념이 정립이 안된 탓일까.

반원을 그으며 나무가 만들어놓은 공간 속에서 상대편 어깨를 밀며 씨름 중인 두 사람은 모두 검은색 팬티를 걸치고 있다. 팬티 색깔이나 샅바 색깔이 다른 요즘 씨름하고는 다른 풍경이다. 아직 씨름복장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한 사람이 서역인임을 알 수 있다. 옆으로 쭉 찢어진 눈과 갈고리처럼 휘어진 매부리코의 주인공이 바로 서역인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속에서 외래적인 요소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무용총에서는 설법하고 있는 스님이 외국인이고, 고구려 벽화고분의 천정이 말각조정이다. 네 귀퉁이에 잘 다듬은 돌을 쌓아올라가는 말각조정의 건축술은 중앙아시아적인 요소이다.

고분 속에서 발견되는 이런 흔적들은 6세기 경에 이미 고구려가 국제적인 도시였음을 말해준다. 더구나 씨름의 종주국이라 말할 수 있는 고구려에서 외국인 신분으로 참가하려면 상당한 기간동안 씨름선수로서 기량을 연마했을 것이다. 그것은 씨름이 고구려 국내행사가 아니라 서역까지도 알려질 정도로 국제행사였다는 뜻이다. 오늘날 일본의 쓰모가 외국선수들이 참가할 정도로 국제적인 행사로 자리잡은 것과 같은 의미이다.

나무와 새를 그리는 솜씨가 그다지 탁월하지 못해도 씨름하는 장면을 무덤의 현실 동쪽벽에 그려 넣을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씨름이 당시 풍속을 대표하는 행사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씨름그림은 그 연원이 고구려 고분벽화까지 닿아 있다. 이만한 족보를 자랑하는 운동경기도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김홍도, <씨름도>, 조선시대, 종이에 담채, 28×23.9cm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527호


김홍도 <씨름도>

메다 꽂아! 안다리 걸어! 오금 걸어!
김홍도가 출전시킨 두 씨름꾼을 바라보며 구경꾼들이 수많은 씨름 용어를 써가며 훈수를 두고 있다. 씨름은 이미 오래 전에 진행된 듯 구경꾼들의 모습에도 오랜 긴장감에서 밀려오는 고단함이 묻어 있다. 팔베개를 하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사람. 양반체면에도 불구하고 저린 다리를 주체하지 못해 왼쪽 다리를 슬그머니 내뻗은 사람. 오른쪽 어깨를 땅에 짚어 꼿꼿해진 허리를 펴는 젊은이 등의 모습에서 현재 씨름판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나이와 신분, 옷 모양과 앉은 자세는 틀려도 씨름판을 향하는 흥분과 들뜸은 씨름선수들만큼이나 격렬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조감도법을 적절히 활용한 이 <씨름도>는 보는 순간에 벌써 씨름판의 열기로 전해지는 작품이다.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 네 귀퉁이를 전부 막아버리는 예는 거의 없다. 너무 답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씨름도>는 네 귀퉁이에 구경꾼들로 가득 메워져 있다. 구경꾼들이 많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계산이다. 그럴 경우 시선이 가운데로만 집중되는 답답함을 뚫어 주어야 할 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엿장수다.

모든 사람들이 씨름판에 넋이 빠져 있을 때 엿장수만이 홀로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월드컵 4강이 치러지는 운동장에서 군중들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던 의경들처럼 고달파 보인다. 그러나 어쩌랴. 김홍도라는 감독에 따라 특별명령이 떨어진 것을.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은 씨름판에 등을 돌리고 있는 엿장수의 시선을 따라 바깥쪽으로 시선을 옮기게 된다. 그럼으로써 자연히 네 귀퉁이에 갇혀 있는 듯한 열기와 답답함이 빠져나간다. 그래야 그림에 숨통이 트인다. 엿장수의 자세와 시선은 답답한 구도를 열어주는 통로이자 그림의 단조로움에 변화를 주는 계산된 전략이다. 한사람의 조연이 주연보다 더 빛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걸 엿장수가 알았더라면, 난 왜 신나는 씨름도 마음대로 구경 못하고 이렇게 재수없게 엿이나 팔아야 하나. 아이구, 내 팔자야! 하는 불평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긴 여유있게 미소 짓는 엿장수의 후덕한 얼굴을 보면 그다지 불평불만을 할 속 좁은 사람은 아닐 듯 싶다. 어린 나이에 엿을 팔아야 되는 고달픈 신세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넉넉한 웃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치밀하게 짜여진 구도에 대한 계산은 씨름꾼들의 신발에도 나타나 있다. 짚신과 발막신의 앞코가 바깥쪽을 향해 놓여져 있다. 신발이 어느 쪽을 향해 놓여 있느냐 하는 것이 무예 그다지 중요할까, 싶어도 그게 그렇지가 않다. 돌맹이같은 작은 소품 하나라도 치밀한 계산 없이는 절대로 화면 속에 들여놓는 법이 없는 김홍도이기 때문이다.

신발을 놓는 위치도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 뒤로 넘어질 듯이 몸을 제치고 있는 두 사람의 머리맡에 신발을 배치함으로써 그 위쪽 공간이 훨씬 넓어 보인다. 유일하게 사람이 그려지지 않고 빈공간으로 남겨져 있는 신발 위쪽 공간은 그 공간 너머로 씨름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둥근 원이 넓게 이어져 있음을 암시한다. 만약 그 공간이 넓다 해서 신발을 위로 올려 놓았더라면 화면은 좁게 끝이 났을 것이다. 하잖은 신발이라도 가볍게 볼 것이 아니다. 적어도 김홍도같은 거장의 작품에서는 그렇다. 그는 그림 속에 쓸데없는 붓질을 보태는 것보다 덜어내는 것을 알았던 작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이상 버릴 것이 없을 때 붓을 놓았다. 그렇게 완성된 그의 그림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원래부터 꼭 그 상태로 그려졌어야 될 그림처럼 자연스럽다.

씨름과 쓰모

고구려 고분벽화 속의 씨름장면에서 김홍도의 씨름판으로 오기까지 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우리 민족은 씨름 속에서 함께 웃고 신명을 다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러한가.

고구려 때부터 이미 서역인들까지 불러들일 정도로 국제적인 운동이었던 씨름. 단지 힘이 세다고 해서 천하장사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란한 기술과 치열한 두뇌작용이 있어야 가능한 씨름. 그 자랑스런 씨름을 우리는 동네잔치로 외면해 버렸고 일본은 일본을 대표하는 상품으로 세계 속에 내놓았다. 우리가 우리 씨름을 그저 어쩌다 한 번 쳐다보는 민속잔치로 골방에 쑤셔 넣는 동안 일본사람들은 쓰모를 다듬고 손질하여 말끔하게 세계 속에 선보였다. 자칫하면 살찐 사람들의 몸싸움으로 끝나버릴 동네 잔치였던 쓰모. 그 잔치 마당에 참가하는 선수들을 체급별로 달리 옷을 입히고 심판관의 복장에 차별을 두었다. 경기 전에 소금을 뿌리며 물을 뿌리면서 전통과 만나는 엄숙함을 곁들였다. 자칫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머리 모양을 옛날 식으로 고집한 것이 오히려 쓰모의 권위를 살려주었다. 자기 전통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온 행위로 일본은 일본을 만들었다. 쓰모와 똑같은 방식으로 가부끼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연극이라는 편견을 벗고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상품이 되었다. 일본이 쓰모와 가부끼를 통해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키워나가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씨름을 외면했다. 그렇게 가치를 모르는 사이 버려지고 잊혀진 우리 문화가 얼마나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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