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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 story/옛그림보기

그림으로 여름 더위 식히기

by May born JCY 2006. 10. 8.

조정육의 옛그림 읽기

선비의 피서 풍경 <탁족도>



▲ 전 이경윤 <고사탁족도> 16세기말, 화첩, 비단에 담채, 국립중앙박물관

가슴을 풀어 헤친 선비가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다. 그냥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다리를 꼰 채 발등으로 발뒤꿈치를 문지르고 있다. 발끝으로 감지되는 시원함이 온 몸으로 전해진다. 쳐다만 보아도 시원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원함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없던 시절, 계곡 물에 발 담그기는 최고의 여름 피서법이었다. 아니, 문명의 이기가 보편화된 지금도 계곡에 걸터 앉아 발 담그는 시원함을 따라갈 피서법은 없다. 조금만 깊은 계곡에 들어 가도 물은 얼음처럼 차갑다. 단언컨대 얼음 같은 물 속에 10분 이상 발을 계속 담글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림의 구도는 매우 단순하다. 오른쪽 하단에서 뻗어 나온 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만들었고 선비는 그 아래 놓여진 너럭바위 위에 앉아 있다. 왼쪽 하단은 선비의 발놀림에 따라 여울을 만드는 물이 그려져 있고, 왼쪽 상단은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빈 공간이다.

이렇게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나무와 바위(혹은 언덕이나 흙더미) 사이에 그려 넣는 형식은 당시 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구도법이었다. 말하자면 인물풍경화의 정석이었다. 이경윤이 그린 그림의 상당수가 이런 구도법을 차용했고 비슷한 시기의 이암이나 후대의 윤두서, 조영석 등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이 구도법을 알고 있었다. 특별히 뛰어난 구도법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림이 실패할 확률도 낮은 평범한 구도법이었다. 그다지 위험이 뒤따르지 않는 구도법이다.

이경윤(李慶胤, 1545~1611)은 조선 중기의 선비 화가이다. 본관은 전주로, 자는 수길이고 호는 낙파, 낙촌 또는 학록이었다. 성종의 열한번 째 왕자였던 이성군 이관의 종증손으로 학림정에 봉해졌다. 절파 화풍을 잘 그렸던 김시와 더불어 조선 중기 화단을 대표하는 이경윤은 그러니까 선비화가이면서 왕족출신 화가이다. 그러니만큼 그림이 얌전하고 격조가 있다.(물론 왕족 출신 화가라 해서 모두 격조 있는 그림을 그린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경윤의 경우에는 그러하다.)

전 이경윤 <고사탁족도> 부분

이경윤이 이렇게 ‘검증된’ 구도법을 따른 것은 아마 그의 신분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다지 실험적인 모험을 감행하지 않아도 안정된 기반 위에서 삶이 계속될 수 있는 사람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보수적이다. 보수가 곧 자신들의 삶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는 데 특별히 불편하거나 아쉬움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김명국 같은 거칠음이나 정선 같은 부지런함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다만 자신들의 입장에서 얼마만큼 정직하게 세상과 만났느냐, 하는 것을 봐야 한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와 권세를 이용해 거들먹거리는 붓질을 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의 작품 속에는 나름대로의 인생이 스며들게 되어 있다.

더위 씻어내기와 정신적인 먼지 털기

이렇게 발 씻는 사람을 그린 그림을 <탁족도>라 했다. 그러니까 웃어른들이, 계곡에 탁족하러 가세, 라고 했을 때는 ‘계곡물에 발 담그러 가자’라는 뜻이 된다. 점잖은 체면에 옷을 홀라당 벗고 수영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계곡물에 발을 담근 채 시라도 한 수 읊으면서 더위를 식혀보자는 뜻이다. 그런데 ‘탁족’은 그냥 발만 씻자는 단순한 의미 너머 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옛날에,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을 것이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을 것이다’ 라는 노래가 있었다. 이 말은 ‘물이 맑은 것처럼 좋은 세상에서는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하고, 물이 흐린 것처럼 탁한 세상이 되면, 벼슬을 버리고 피하여 숨어 산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금 선비가 발을 씻고 있는 것은 더위를 피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세상에 살면서 쌓인 ‘정신적인 먼지’를 씻어 낸다는 의미가 더 크다. 자신을 다스리는 ‘수신’이면서 또한 세속을 벗어나 ‘청정함’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인 것이다.

이경윤의 작품에는 김명국 같은 격렬함이나 장승업 같은 재주는 없지만 선비로서 지녀야 할 품격과 정신이 들어있다. 그는 이런 식의 그림을 여러 점 남겼다. ‘탁족도’처럼 정신의 먼지를 씻어내기를 원했을 뿐만 아니라 때가 아니면 그때가 되기를 기다릴 줄 알았다.

세월을 낚고 있는 어부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휘날리는 한여름. 더위를 피하기 위해 삿갓을 쓴 선비 하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한쪽 팔은 바닥을 짚고 앉아 왼손으로 낚시질을 하고 있는 낚시꾼의 모습은 느림 그 자체이다. 비스듬히 앉은 자세는 딱히 물고기를 많이 잡겠다는 의사가 전혀 없음을 보여준다. 낚시 그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의 내용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강태공’ 이야기다.

옛날 중국의 주나라 때 ‘강태공’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나이 80이 되도록 평생을 공부만 하고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라가 어지러워 정치에 나가도 자신의 올바른 뜻을 펼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날이면 날마다 낚시만 했다.

전 이경윤, <낚시질>, 16세기말, 화첩, 비단에 담채, 고려대학교 박물관


그러나 강태공의 낚싯대에는 바늘이 없이 실만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진짜 고기를 잡기 위해서 낚시질을 한 것이 아니고 때를 기다리기 위해 세월을 낚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결국 나중에 주나라의 문왕이 될 사람이 강태공을 찾아와 왕사(임금의 스승)가 되어 줄 것을 청했고, 강태공은 그를 도와 주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결국 주나라는 강태공의 정치 조언으로 다스려지게 되었으니, 강태공은 자신이 꿈꾸었던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한 평생을 고기 한 번 낚지 못하고 앉아 있었지만, ‘천하’라는 큰 물고기를 낚았으니 세상에서 가장 큰 물고기를 낚아 올린 셈이다.

그때부터 강태공은 단순한 낚시꾼이 아니라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을 의미하게 되었고 ‘낚시질한다’는 것은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린다’는 의미로 쓰여지게 되었다. 지금 당장은 희망이 없고 막막할지라도 언젠가는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세상에서 가장 큰 물고기를 낚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다리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강태공을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대낮에 산을 오르며 빈 낚시를 드리우고 있다. 때론 푹푹 찌는 더위를 견디며 취직 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낚시꾼도 있다. 모두 우리 시대의 강태공일 것이다.

작가의 혼을 녹여서

<낚시꾼>의 구도는 역시 <탁족도>와 비슷하다. 다만 멀리 흐릿하게 사라지는 강안의 모습이 <탁족도>보다 ‘공간감의 깊이를 더해준다. 그렇다면 비슷한 구도인데 <탁족도>의 왼쪽 공간을 텅빈 채로 남겨놓은 까닭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전 이경윤 <낚시질> 부분

그것은 작가의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뜨거운 여름날 강가에서 발을 담그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탁족’은 대부분 계곡에서 이루어진다. ‘탁족’하는 바로 윗부분에 폭포가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아니라도 계곡의 바위 사이를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는 물은 수증기같은 시원함과 안개 같은 아득함을 동반한다.

<탁족도>에서는 윗부분을 비어 놓음으로써 그 빈 공간에 폭포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그리고 있다. 그럼으로써 신비스러운 계곡의 시원함이 화면 밖으로 무한히 확장되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이렇게 작가들은 같은 구도를 차용해도 대충 그리는 법이 없다. 그림이 놓여진 환경 속에 완전히 몰입된 뒤에야 붓을 든다. 그래서 같은 장소를 그려도 작가마다의 개성이 드러나고 작가가 살아 온 만큼의 인생이 녹아들게 마련이다.

그렇게 작가가 신산스런 인생에서 느낀 정신을 제대로 표현해주었을 때, 보는 사람은 숙연해지게 된다. 신분과 세월을 뛰어넘어서 감동받는다. 그래서 이런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더위도 잊어버리고 작가의 마음에 귀기울이게 된다. 올여름에는 계곡에 가서 ‘탁족’을 해 볼 일이다. 아니 고기를 낚지 못하더라도 빈낚싯대라도 드리워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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