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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 story/옛그림보기

승천하는 용같은 매화 그림

by May born JCY 2006. 10. 8.
조정육의 옛그림 읽기
조희룡의 매화 그림 읽기


▲ 조희룡, <홍매도>, 대련, 족자, 종이에 담채, 127.5×30.2cm, 한국 개인

심하게 몸부림치던 용이 격렬하게 몸을 뒤채이며 승천하고 있다. 온몸에서 불을 뿜듯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꿈틀거린다. 조희룡은, 죽어 있는 듯 뒤틀린 채 서 있는 매화나무에 붉은 꽃이 피어오르자 마치 승천하는 용을 보는 것 같았다. 심하게 각지고 꺽인 고목에 꽃이 피자 붉은 기운이 확확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겨울 추위를 삽시간에 몰아내 버릴 정도로 뜨거운 열기였다.

그 뜨거운 정념을 조희룡은 화면 가득 쏟아 부었다. ‘미친 듯이 그리고 어지럽게 긋는다(狂塗亂沫)’는 표현에 어울리도록 격정적인 발화의 충동을 덜썩 내려놓았다. 오랜 세월 승천을 꿈꾸던 용의 붉은 마음은 그렇게 조희룡의 손 끝에 사로잡혀 두 폭의 매화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은일(隱逸)과 은둔(隱遁)의 상징, 매화

용을 화폭에 사로잡으면서 조희룡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줄기 하나를 치더라도 용을 움켜잡고 범을 잡아 매듯이 해야 하며, 꽃 한 송이를 그려 넣더라도 구천에서 현녀(중국 고대의 여신으로)가 노닐 듯이 해야 하며, 한줌의 벼룻물은 푸른 바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일찍이 원나라 사람이 용을 그린 것을 보았는데, 먹을 뿌려 구름을 만들고 물을 머금어 안개를 만들었다. 매화를 그리는데 얽히고 모인 가지와 만가지 꽃의 향배 정할 곳에 이르면 문득 이 생각이 떠올라서 크게 기굴(奇崛)한 변화가 있게 한다. 용을 그리는 법을 매화그림에 도입했으니, 그림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하한시할 것이다.”

날카로우면서도 거칠고, 힘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움을 다치지 않는 <홍매도 대련>은 조희룡이 지향했던 조형 세계가 정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장식적이면서 자유분방한 그의 필치에서 탄생된 매화꽃잎. 그 꽃을 조희룡은 신선들이 먹는 단약(丹藥)으로 생각했다. 혹은 화난 미인의 뺨이라고도 했다. 그런가 하면 부처가 현신한 것으로 생각했다. 매화 꽃송이에 점을 찍으면 보살상이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조희룡이 그다지도 좋아했던 매화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가장 널리 알려진 상징적인 의미는 아마도 ‘군자’일 것이다. 유교를 근본으로 하는 조선시대에 군자는 가장 이상적인 선비정신을 간직한 사람으로 추앙받았다. 또한 매화는 추위를 뚫고 나와 꽃망울을 터트리는 꽃으로, 선비의 지조와 절개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런 매화의 상징성 중에서 여러 화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의미가 ‘은일(隱逸)’, ‘은둔(隱遁)’이다. 눈 속의 매화를 찾아서 설산을 헤매고 다닌 당나라 시인 맹호연(689~740)의 고사는 <탐매도>라는 제목으로 많은 화가들의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맹호연과 더불어 은일의 상징으로 알려진 사람이 북송대 시인 임포(967~1028)이다. 그는 고산에 살면서 매화를 심어놓고 20년 동안 도시에 내려가지 않고 살았다 한다. 결혼도 하지 않은 그는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자식 삼아 매화를 감상하며 시를 읊었다. 어쩌다 손님이라도 오는 날이면 학이 공중에서 울어 소식을 알렸다. 시를 짓다 가끔씩 술 생각이 나면 심부름꾼인 사람의 목에 술병을 걸어 술을 사러 보냈다.

정말 꿈같은 이야기다. 복잡한 도시생활에 치여 휴식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볼 법한 이상적인 삶이다. 아무튼 임포의 유유자적한 생활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듯 그를 주제로 한 그림이 시대를 넘어 지속적으로 그려졌다. 매화가 만발한 가운데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는 <매화서옥도>, 학이 날아 올라 손님이 온 것을 알려주는 <방학도>, 매화를 감상하고 있는 선비를 그린 <관매도> 등은 모두 임포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매화서옥도>는 조희룡을 비롯한 중인 출신 여항문인들이 즐겨 다룬 화제였다.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의 향수층이 된 여항문인들이 추구했던 세계가 어디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다. 사대부 문인들 못지 않게 실력과 경제력에서 뒤지지 않았던 여항인들.

그러나 신분적인 한계는 여전하여 사회적 제약 속에서 살아야 했던 그들은 스스로의 신분적인 한계를 느끼면서 그것을 문화적으로 해소하려 했다. 그 갈등과 모순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기보다는 상층 지향적인 문화를 향유하면서 스스로 자족하거나 안주해 버리려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유배기의 매화 그림

그러나 <홍매도 대련>에서는 여러 가지 상징성보다는 오직 매화 자체에서 느껴지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에 몰입했다. 붓에 먹을 묻혀 툭툭 찍어 내리듯 표현된 매화 등걸은 오랜 세월을 절치부심하며 기다려온 용의 비늘처럼 까칠하다. 용의 비늘을 뜯어내어 만든 듯한 제화시 끝에 ‘소향설관(小香雪館)’이란 관지가 있어서 유배기인 1860대 초반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독기 서린 바다, 적막한 물가, 황량한 산과 고목 사이에 달팽이집같이 작은 움막 속에서 움츠려 떨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한묵의 능사에 손을 대어 온갖 돌과 한 떨기 난초를 때때로 그려내었다. 되는 대로 붓을 놀리고, 먹을 튀겨 빗물처렴 흩뿌려서 돌은 흐트러진 구름처럼, 난초는 젖혀진 풀처럼 그리니 자못 기이한 기운이 있었다. 하지만 알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애오라지 스스로 좋아할 따름이다.”

1851년(철종2년) 63세의 나이로 영광 임자도(荏子島)에 유배된 조희룡이 쓴 글이다. 그 곳에서 3년을 보내는 동안 그는, 집 뒤의 황량한 산과 문 앞의 고래파도가 일렁이는 가운데 크고 작은 대나무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세월을 견뎠다.

“시를 지으매 모두 위태롭고 고독하고 메말라 부드러운 글자와 여유로운 글귀의 빼어나고 활발하고 명랑하고 윤택한 것이 없다. 그리하여 시를 덮어 두고 그림에 들어갔다. 손이 가는대로 칠하고 그어 먹기운이 생동하여 가슴 속의 불평한 기운을 표출해대니, 문득 소슬하고 높은 뜻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오직 이 한 가지 일이 일체의 고액을 극복해가는 법인 것이다.”

그는 ‘눈 쌓인 바닷가에서 문을 닫고 거북처럼 움츠려 있으면서 날마다 매화 몇 장을 그려서 울적한 회포를 풀기도’ 하였다. 바닷가 산 산기슭에 살면서 고요히 나무, 돌, 구름, 노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늙은 나무와 여읜 돌은 초묵(蕉墨)이 아니면 그 고경(古勁)하고 창로(蒼老)한 의경을 표현할 수 없었다. 변화하는 구름과 환상적인 노을은 담묵이 아니면 착잡하게 펼쳐지고 점점이 엮어진 뜻을 얻을 수 없을 성싶었다.

그렇게 외롭고 고독한 마음을 그림으로 채워나갔다.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내면 속에 도사리고 있는 분노와 울분을 <세한도>라는 작품 속에 단색의 먹으로 풀어내고 있을 때 조희룡은 홍매로 격정을 퍼부었다. 때로는 ‘은하수에서 쏟아 내린 별무늬같고 오색 빛깔 나부산의 나비를 풀어 놓은 것 같은’ 매화를 그렸다.

임자도 유배 이후에는 매화와 난을 바위와 함께 그리기도 하였다. 그 곳에 먼저 유배와 있던 김태라는 사람과 친해진 결과였다. 회령부사를 지냈던 김태는 수석에 취미가 있어 조희룡의 눈을 트게 해준 사람이었다.

조희룡의 매화 사랑

조희룡의 매화 사랑은 극진하여 자신이 거처하는 곳에 ‘매화백영루’라는 편액을 달고 침실에는 매화 병풍을 둘렀으며 매화차를 마셨다고 한다. 또 매화 벼루에 매화 먹을 갈아 매화시를 썼다고 하니, 삶 자체가 바로 매화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귀양살이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매화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조희룡 의해 그려진 홍매도는 조선 말기에 하나의 유행처럼 번졌다. 특히 한 그루의 매화를여러 폭의 병풍에 펼치듯이 그리는 그림 형식은 조희룡의 이전 시기에는 볼 수 없었던 조선 말기 매화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후 허련, 유숙, 장승업 등에 의해 이런 형식의 병풍식 매화가 제작되었다. 장식적이면서도 대작인 병풍식 매화가 많이 그려졌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적인 수요가 많았음을 말해준다.

조희룡은 19세기에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이론가로서도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그는 청나라 장경(張庚)이 지은 『화징록(畵徵錄)』같은 화가열전을 쓰고 싶었으나 자료의 부족으로 이루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했다. 조희룡이 이루지 못한 꿈은 다음 세대인 오세창(吳世昌)에 의해 『근역서화징』이란 이름으로 결실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중인들의『호산외기(壺山外記)』를 비롯하여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화구암난묵(畵鷗盦讕
墨)』『한와헌제화잡존(漢瓦軒題畵雜存)』『우해악암고(又海岳庵稿)』『수경재해외적독(壽鏡齋海外赤牘)』『우봉척독(又峰尺牘)』등의 책을 저술하여 회화이론가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중 거의 대부분의 책이 유배지에서 완성됐다. 그렇다면 예술가에게 유배지는 필요악이었을까.

그는 유배 오기 4년 전인 1847년 봄에 ‘벽오사’라는 시사모임을 결성하였다. ‘벽오사’는 유최진을 맹주로 하여 사회적, 경제적으로 성장한 여항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풍류모임이었다. 그곳에서 조희룡은 59세로 가장 나이가 많았고 요절했던 천재화가 전기는 23살이었다. 나이 차이를 떠나 서화를 모으고 감상하는 서화고동 취미와 시서화를 함께 즐기는 문인적 취향으로 결성된 시사회였다.

조희룡, 전기, 유재소, 유숙 등 당시를 대표하는 여항문인화가들이 주축이 될 만큼 활발한 활동상을 전개하였다. 이런 활발한 모임을 통해 조희룡은 스스로가 속해있는 중인 집단을 기록할 필요성을 느껴『호산외기』같은 기록물을 남겨야 되겠다는 자각을 하였을 것이다.

“글씨와 그림은 모두 솜씨에 속한 것이니, 그 솜씨가 없으면 비록 총명한 사람이 종신토록 그것을 배울지라도 능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손 끝에 있는 것이지, 가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정의했던 조희룡. 그에 의해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그것은 곧 장승업같은 화가가 인정받는 시대가 가까이 와 있음을 의미했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회화사를 전공한 후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회화사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한국학술진흥재단 지원의 ‘제국미술학교 조선인 유학생들’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해오고 있으며, 현재는 국민대와 성신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어린이를 위한 우리나라 대표 그림》《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가을 풀잎에서 메뚜기가 떨고 있구나》《붓으로 조선 산천을 품은 정선》《신선이 되고 싶은 화가 장승업》《말괄량이 보리와 우리 미술 속으로 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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