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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 story/옛그림보기

진경산수,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도전

by May born JCY 2006. 10. 8.
조정육의 옛그림 읽기
정선의 우리 산과 우리 그림



▲ 정선, <금강전도>, 견본담채, 28.5×34.0cm, 고려대학교 박물관

낯설음과 낯익음

조선 미술사를 논할 때, 정선이라는 작가를 만나면 왠지 반갑다. 정선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언젠가 중국 상해 공항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외로움을 맛보았다.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출국자 신고서를 쓰고 있을 때였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무척 낯설었다. 이상했다. 얼굴이나 차림새는 나와 똑같은데 왠지 그들이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방송에서는 끊임없이 다국적 언어가 흘러나왔고, 출국 수속을 하는 사람들로 공항은 정신없이 소란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치 진공상태에 빠진 것처럼 멍청해졌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나는 그 낯설음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한동안 멍한 상태로 붐비는 사람들 속에 서 있어야만 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처음 가 본 도시에 혼자 버려졌을 때 누구나 느끼는 두려움이었을까, 아니면 오랜 여행으로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쉽사리 나는 그 낯설음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우연히 한국어를 하는 사람들이 내 옆을 지나갔다. 그제서야 난 그 낯설음이 어디서 흘러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서양사람도 아닌 내 얼굴과 똑같은 동양사람들 속에 섞여 있다 보니 순간적으로 내가 한국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외국 여행을 오래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처음 도착한 도시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해지면, 이곳이 한국인지 외국인지 그다지 의식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더구나 내가 있던 곳이 상해였으니 마치 한국에서 여행하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리고 전혀 의미 파악이 되지 않는 소음 같은 외국어 속에서 문득 ‘나의 언어’를 발견했을 때 비로소 나는 나를 가두고 있던 낯설음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얼굴이 비슷하다 해서 결코 같아질 수 없는 문화적 차이를 그 때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인이나 조선인이나 일본인이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지만 언어가 다르듯 문화도 다를 수밖에 없음을 상해 공항에서 깨달았다. 정선의 그림은 내게 상해 공항에서 느꼈던 모국어처럼 반갑다.

진경산수는 우리 언어로 말하는 것

정선(1676~1759)은 영조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정조시대에 김홍도가 있었다면 그 이전시대에는 정선이 있었다. 정선이 진경산수의 문을 열어놓았기에 김홍도 같은 불세출의 화가가 탄생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길을 갈 때 남들이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 간다. 조금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내 앞을 먼저 걸어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안심할 만한가. 길 없는 길을 처음으로 내 발로 밟아서 만들어야할 때 누구나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없는 길을 내야하는 선구자들이 없다면 새 길은 영원히 뚫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선은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선은 중국식 기법으로 그림을 그리던 기존의 화단에 진경산수라는 새로운 길을 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관념적인 산수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장소를 그린다는 것은 자칫하면 ‘지도 같다’라는 편견 속에 갇혀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선은 우리 나라에 실제로 있는 산과 강, 나무와 바다, 집과 건물 등의 실경산수를 그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조선 팔도 안의 실경을 보러 다니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조선의 그림 속에 조선의 풍경과 사람이 담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이 실경에서 느낀 감동을 단순히 그림으로만 남기지 않고, 그 실경 안에 자신이 연구하고 공부한 사상을 쏟아 부었다. 중국 산천을 그리다 나오게 된 준법으로 우리 나라 산천을 표현한다는 것이 왠지 마뜩찮았다. 자신의 내부에서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그 마뜩찮은 감정을 무시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철저하게 응시했다. 내부를 향한 응시와 무조건적인 노력, 그 두가지 대책 없는 작가의 혼이 금강산을 만났을 때 정선은 비로소 정선이 되었다.

정선, <금강전도> 부분

금강산이 만든 화가, 금강산을 만든 화가

정선은 금강산과 관련된 그림을 수없이 많이 그렸다. 그것은 그만큼 그의 금강산 그림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려서부터 물리도록 금강산 이야기를 듣고 자랐던 만큼 금강산을 잘 알았다.

그러니만큼 금강산 그림도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더구나 정선은 금강산 화가로 유명했다. 36살 때 그의 스승 김창흡을 따라 금강산을 다녀 온 정선은 금강산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화가에게 빼어난 경치만큼 붓을 들게 하는 원인도 없을 것이다. 그는 금강산에서 받은 감동을 무수히 많은 붓질을 통해 토해내고자 했다.

금강산에 들어가는 대문인 단발령. 그 곳에 서서 바라보는 금강산은 그야말로 신선이 사는 곳이었다. 오죽하면 금강산의 입구를 단발령(斷髮嶺)이라 했을까. 금강산을 본 사람은 속세에 미련을 떨쳐 버리고 곧바로 머리를 깎아 스님이 되고자 하는 고개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영원한 것을 찾고자 하는 충동을 이기지 못해 머리를 깎았다고 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금강산을 작가로서 한창 필력이 무르익던 시기에 찾아갔던 정선은 그 이듬해에 다시 한 번 찾아갔다. 두 번의 금강산 여행을 통해 정선은 금강산이 가진 신묘함에 깊이 감동받았다. 그리고 그 감동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해 무척 고민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중국식 화보를 봐 가며 공부했던 그림 기법으로는 금강산을 온전하게 그릴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금강산이 지닌 모습을 감동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현장에서와 같은 생생함을 전달할 수 있을까. ‘경쾌한 놈은 날 듯하고, 뾰족한 놈은 꺽인 듯하고, 빽빽이 선 놈은 서로 친밀한 듯하고, 살찐 놈은 둔한 것 같고, 여윈 놈은 민첩한 것 같아 그 천태만상이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곳,’ 그런 곳이 바로 금강산이었다.

그리고 그 곳은 바로 조선땅이었다. 중국의 산과 땅이 조선과 다르듯 그림을 그리는 기법도 중국과 조선이 같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신비로운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금강산을 구태의연한 중국식 기법으로 그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정선은 숱한 날들을 고민 속에 보내게 되었다.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질긴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정선은 끊임없이 산수의 모습을 관찰하고 파악하면서 무진장 많은 밑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나를 찾는 행위

한 화면 속에서 금강산을 왼쪽과 오른쪽이 다른 모습으로 그렸다. 왼쪽의 낮은 야산에는 짙푸른 나무가 우거진 숲이 그려져 있고, 그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오른쪽과 위쪽 부분은 뾰족뾰족한 바위가 그려져 있다.

실제 금강산이 이렇게 숲과 바위산으로 명확하게 나뉘어 있지는 않다. 숲 사이에 바위산이 있고, 그 사이사이에 계곡과 절벽과 폭포가 자리잡고 있는 등 이 모든 요소들이 서로 섞여 있다. 그런데 정선은 그 어느 산보다도 우람하고 멋있는 바위산을 두드러지게 강조하기 위해 화면을 둘로 나누어 대조적으로 그린 것이다.

이것은 또한 산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성격, 곧 음과 양의 서로 다른 특징을 보여주려고 계산한 결과이기도 하다. 강하고 웅장한 바위산이 양이라면 부드럽고 습윤한 나무숲은 음에 해당한다. 동양 철학에서 음과 양은 서로 어울릴 때 더욱 돋보이고 조화를 이룬다고 가르친다.《주역》에 음양의 논리에 해박했던 정선이니, 그가 그릴 만한 그림 배치가 아닐 수 없다.

정선, <금강전도> 부분


우리 산천을 그리는 실경산수의 전통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있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선이 그린 그림을 실경산수와 구별하여 특별히 ‘진경산수’라 부르는 것은, 정선이야말로 우리 산천의 진짜 경치를 그릴 줄 알았던 작가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라는 정체성을 찾기 위해 평생을 바친 화가에게 바치는 최고의 찬사가 될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행위. 그것은 발로 뛰는 부지런함과 새 길을 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냈을 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노력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필요한 화두이다. 3백년 전에 살았던 정선이 이미 그 길을 가르쳐주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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